주역으로 보는 세상 읽기(52) - 道說漫筆(도설만필)

이응국 | 기사입력 2007/12/26 [13:54]

주역으로 보는 세상 읽기(52) - 道說漫筆(도설만필)

이응국 | 입력 : 2007/12/26 [13:54]
 
* 道說漫筆(도설만필)

  一人爲大(일인위대)요 一大爲天(일대위천)라 하니, 사람(人)은 하나(一)를 얻어서 大(대)가 되고, 大(대)는 하나(一)를 얻어서 하늘(天)이 된다는 뜻이다. 이때에 一(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옛날 송나라 때의 학자인 주렴계 선생은 ‘一(일)은 無慾(무욕)이다’ 하였다. 사람이 욕심을 없애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정신이 맑아지면 聖人(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聖(성)은 無不通(무불통)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귀(耳)로 듣거나 입(口)으로 말함에 무불통인, 세상에 으뜸(壬)가는 자를 말한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면 ‘精神一到(정신일도)’에 이를 수 있는데,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것 즉 ‘하나를 얻는 것(得一)’을 성인에 이를 수 있는 길로 본 것이다.

  得一(득일)은 욕심을 없앰으로써 오는 것이니 욕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욕심은 나를 위하고자 하는 私心(사심)에서 오는 것이니 私心(사심)은 눈·귀·입을 통해서 들어온다. 눈을 뜨면 五色(오색)에 마음을 빼앗기고, 귀를 열면 五音(오음)에 마음을 빼앗기고, 음식을 먹으면 五味(오미)에 마음을 빼앗기니, 눈과 귀와 입은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기관인 셈이며  욕심은 마음을 해치는 도적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옛 사람들은 욕심을 없애기 위해서 靜坐(정좌)를 강조했다. 눈과 귀와 입을 닫고(三昧)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은 스스로 고요해지고 정신은 스스로 맑아진다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 得一(득일)이 된다는 것이다.『도덕경』에서 말하기를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아지고(天得一以淸),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해진다(地得一以寧)’ 했으니, 사람 역시 하나를 얻어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성인과 성인 사이에 심법으로 전해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老子(노자)는 靑牛(청우)를 타고 函谷關(함곡관)을 지나다가 關令(관령)인 尹喜(윤희)에게 『도덕경』오천 여 언을 지어 전했으니, 이는 실은 ‘守一(수일)’하라는 뜻이요, 석가모니는 靈山會上(영산회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며 拈花微笑(염화미소)로써 迦葉(가섭)에게 心法(심법)을 전했으니 이 또한 실은 ‘歸一(귀일)’을 가르친 것이다. 공자 또한 요임금 이래 심법으로 전해진 ‘允執厥中(윤집궐중)’의 도맥을 曾子(증자)에게 전했으니 ‘貫一(관일)’을 가르친 것이다.

  三敎(삼교)의 聖人(성인)이 모두 一(일)을 가르치고 전했으니 공부하는 자리는 一(일)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一(일)은 바로 道(도)에서 생한다. 『노자청정경』에서 말하기를, ‘大道(대도)는 無形(무형)이라 天地(천지)를 生育(생육)하고, 대도는 無情(무정)이라 日月(일월)을 運行(운행)하고 대도는 無名(무명)이라 萬物(만물)을 長養(장양)하나니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억지로 말하자면 道(도)라 한다’ 하였다. 또한 『도덕경』에서 말하기를, ‘道(도)는 一(일)을 생한다’ 했으니, 道(도)는 無慾(무욕), 無爲(무위) 등과 서로 통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無(무)자와 道(도)자는 쓰임새가 서로 비슷하다. 無形(무형), 無情(무정), 無名(무명) 등 모든 글자에 無(무)자를 붙일 수 있음은 無(무)에서 有(유)가 나오는 이치를 보인 것이고, 天道(천도), 地道(지도), 人道(인도) 등 모든 글자에 道(도)자를 붙일 수 있음은 도는 모든 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의 말씀과 같이 道(도)라는 것이 無形(무형)하고 無情(무정)해서 이름도 붙일 수 없으니 사실 無慾(무욕)이니 無爲(무위)니 것들도 한계를 지닌 표현일 수밖에 없고 방편적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다.

 『禪家龜鑑(선가귀감)』에 마침 이에 대한 좋은 시 한수가 있으니 한번 음미해 보자.

  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에           옛 부처 나기 전에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이라       응연히 하나의 둥근 모습이라 
 

  迦猶未曾(석가유미증)이어니    석가도 오히려 몰랐거니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고          가섭이 어찌 능히 전하랴.




  옛 선승들도 道(도)를 ‘이름 없고 모양 없는 한 물건(一物)’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공자도 “나는 말이 없고자 하노라(予欲無言)”하시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요! 四時(사시)가 행하며 만물이 생하나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요!” 하셨으니, 이 역시 無爲之道(무위지도), 不言之敎(불언지교)를 말씀한 것이다.

  노자도 玄妙(현묘)한 그 이치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억지로 붙여 말하자면 도(强名曰道)라’고 했다. 그렇다면 道(도)는 전할 수도 없는 것이고, 가르칠 수도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노자도 도를 전하기 위해 오천 여 마디의 글을 남겼고, 석가모니도 도를 전하기 위해 팔만사천 법문을 남겼고, 공자도 도를 전하기 위해 六經(육경)을 정리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이 끊어진 그 자리에 道(도)가 있다고 하지만 세 분 성인 모두가 말과 글을 방편삼아 도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道(도)라는 글자 자체에도 그 이치를 담고 있을 듯 싶은데, 道(도)라는 글자는 먼저 두 점을 찍고 ‘한 一(일)’자를 그으니, 좌측은 양을 상징하고 우측은 음을 상징하며 一(일)은 태극을 상징한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니 음과 양이 태극에 붙어서 서로 상대하는 모습이다. 음양은 氣(기)로써 말하는 것이고, 태극은 理(이)로써 말하는 것이니 만물발생의 근원으로서 태극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스스로 自(자)’자를 아래에 붙였으니 自(자)는 自己(자기), 自身(자신)의 뜻으로 자신의 몸 위에 태극이 깃들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합해서 ‘머리 수(首)’자도 되니 머리는 修道(수도)를 함에 가장 요긴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다음에 ‘辶(착)’ 자는 ‘쉬엄쉬엄 갈 착’자이다. 道(도)는 때로는 動(동)하며 때로는 靜(정)하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도는 ‘내 몸 안에 있는 것이며 도에 의해서 하나를 이루고 때로 동정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중용에서 말하기를 ‘天命(천명)을 性(성)이라 말하고 性(성)을 따르는 것을 道(도)라 말한다’ 했다. 또한 ‘道(도)라 하는 것은 잠시도 내 몸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몸을 떠나면 도가 아니다’ 했으니, 儒家(유가)에서 말하는 ‘性卽理(성즉리)’가 바로 이러한 뜻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도가 있지만 모습도 없고 소리도 없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 같지만 도는 분명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無思(무사), 無爲(무위) 속에서 寂然不動(적연부동)함으로써 도를 밝힐 수 있다. 그래서 靜坐(정좌)를 하고 눈·귀·입을 닫고 無慾(무욕)하려 하지만, 욕심을 없앤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이 耳目口鼻(이목구비)에 매어 있으므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코로 냄새 맡는 사이에 욕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정신은 본래 淸靜(청정)하길 좋아하지만 욕심으로 인해서 마음은 요동치고 정신은 혼탁해지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욕심을 없애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상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니 욕심을 적게(寡慾(과욕)) 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푸름을 자랑하던 나무가 가을이 되면서 낙엽지고 시드는 것은 가지 끝까지 뻗쳐 있던 기운이 歸根(귀근)하기 때문이니 이는 살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귀근이란 다름 아닌 고요함(靜)에 처하고, 無(무)에 들어가고, 柔(유)를 이용하는 것이다. 長生(장생)의 도는 귀근함과 같이 근원을 추구하는 데 있으니 사람도 마찬가지로 禁慾(금욕)·節制(절제)하는 마음, 謙虛(겸허)한 자세, 恭遜(공손)한 태도 등에서 장생의 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들이 바로 寡慾(과욕)하려는 마음에서 요구되는 것들이다.

  修道(수도)하는 사람은 정신과 마음을 淸靜(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妙(묘)를 삼는 법이니 이목구비를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것은 곧 눈과 귀와 입을 청정하게 하라는 것이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寡慾(과욕)을 가르친 것이다.

▶ 필자는 대전광역시 유성문화원과 학회에서 주역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14:00~16:00 : 주역상경.(학회강의실)
매주 목요일 19:00~21:00 : 주역기초.(유성문화원)
매주 화요일 19:00~21:00 : 대학중용.(학회강의실)
※ 수강료 : 50,000원 /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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