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출소,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산다”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최재만 구명 스토리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4/14 [21:52]

“사형수 출소,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산다”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최재만 구명 스토리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10/04/14 [21:52]
감형 소식을 받던 날의 기쁨
 
삼중 스님은 최재만의 노모가 충격으로 쓰려져서, 잘못하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배 장관 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극도로 치민 화를 참아가며 이야기했겠지만, 평소의 말투처럼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배 장관의 정보는 정확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취임 사면권으로 최재만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이 되었으나, 중견간부들은 최재만의 특별 감형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신문에 떠들던 사람을 살려놓으면 이러한 판례가 또 발생될 것을 우려한 중견간부들이 일을 뒤로 미뤄두었다고 한다. 1차 명단에 최재만의 이름을 일부러 누락시켰던 것이었다. 이렇게 최재만의 사건은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배 전장관의 재촉전화를 받은 현직 법무부 장관은 2차 명단을 서울교도소로 보내어 결국 최재만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날은 참 특이한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최재만에게도 그의 아내에게도 기쁨이 넘쳐 통곡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그 아내의 승리입니다. 사형수 남편을 17년간 기다린 아내가 참 대견하고 장해요. 최재만은 자신을 믿고 기다려 주는 아내와 애들 때문에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어요. 만약 아내가 없었다면 최재만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산산조각 났을 겁니다. 절에서는 법당이 2층에 있었어요. 늘 2층에서 기도를 하는 그의 아내는 살아있는 보살이었어요.
 
최재만이 살아나는 그 날도 지장보살님 앞에서 고단한 몸을 이끌고 108번 절의 100일째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죠. 또 그 날이 시아버지 제삿날이었는데 그 날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에요. 최재만에게도 감형 소식을 알려주자, ‘스님, 제가 오늘 살아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넌 살았다. 앞으론 조금이라도 추한 실수라도 하지 마라.‘하는 아버님의 말씀으로 제가 살아 난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모두 신비스러운 이야기이죠.”

최재만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는 그 기쁨에 스님과 노모는 도와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고 한다. 한 생명을 살리는데 도움을 주신 구상 시인, 배 장관, 서옹 종정 스님들을 차례로 다니면서 고마움을 전달했다고 한다.

“나는 노모를 앞세워 우선 구상 시인 집에 갔어요. 노모가 구상 시인에게 큰 절을 했어요. 20년이나 나이 많은 노인의 절을 받은 구상 시인은 ‘스님, 저에게 왜 이러시냐? 왜 나를 못 견디게 이러시나요?’하면서 같이 큰 절로 답례를 했어요.
 
태평양 법무법인 창립자인 배 장관(변호사)에게도 찾아 갔죠. 이 양반도 벌떡 일어나면서 노모의 절을 받지 않았어요. 인사 후 나오는데 나에게 인삼 한통을 주면서, ‘이 자리에서 건네시지 마시고 나중에 어머님께 주십시오.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잘 버티셔야 한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이 분들은 참 겸손하고 좋으신 분들입니다.”

구상 시인은 최재만을 양아들로 입적하여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였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먼저 세상을 떠나신 구상 시인 이야기에 그만 눈물이 핑하게 눈가를 젖혔다.

“최재만이 무기형으로 10년을 수감하고 있던 시절, 그 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던 해였어요. 구상 시인은 최재만의 아내를 며느리처럼 사랑했어요. 최재만은 참 복 많은 놈이었죠. 구상 시인이 그 아들을 끌어안고 우시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구상 시인은 일본여행을 다녀오시면 꼭 감옥에 있는 아들을 위해 종이와 먹을 사다 주세요. 끝없이 아들을 위해 챙겼어요. 최재만도 역시 효자였지요. 구상 시인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수 없이 부처님께 빌고 빌었어요. 구상 시인이 최재만의 편지를 읽어보고 썼던 시에는 절절한 부자간의 사랑이 묻어 있어요.
 
최재만은 곧 닥아 올 어버이날에 아버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꼭 달아드리고 싶다는 편지를 구상 시인에게 보냈어요. 이 편지에 대한 답을 구상 시인은 시로 표현을 했죠. 내 가슴에 양아들 손으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받는 것 보다 그 놈 가슴에 축하의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사건이 발생한 지 15년이 지난 해, 범죄 시효가 끝난 해에 최재만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왔다고 한다. 애절히 진범에게 보내는 편지를 삼중 스님은 회상한다.

“최재만은 진범에게 원고지 한 30매 정도의 긴 편지를 썼어요. 내용은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나 범죄시효는 끝났다. 아주 애절하게 호소하는 내용이었죠. 나에게는 노모가 계시다. 이 놈 한번 안아 보고 죽고 싶다는 노모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선다.
 
아내와 자식 두 명이 간절히 나를 기다린다. 나를 가정으로 돌려보내 달라. 시효가 지났으니 너희들은 법으로 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조갑제 기자를 통하여 월간조선에 실었어요. 그의 글은 기억하는 분들도 아마 계실 거예요.”
 
시인 구상의 감형 노력
 
최재만을 사랑하는 구상 시인은 정권이 바뀌어 김대중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 사면으로 아들을 교도소에서 나오게 하려는 궁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대철 의원을 불러 사면 요청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구상 시인은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 운동을 함께 하신 분이예요. 구상 시인은 이승만 정권과는 무섭게 싸웠던 분이죠. 정대철 국회의원의 아버지와는 절친한 친구이셨죠. 그래서 정대철 의원을 집으로 오라고 하여 ”내 아들놈이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사네. 당신의 대통령으로 정권도 바뀌었으니, 내 새끼를 나한테 돌려 보내주게. 이 편지를 대통령께 전달해 주게나.’ 구상 시인은 좀처럼 남에게 부탁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이런 분이 양아들과 그 가족을 사랑하다보니, 자신이 직접 대통령께 청탁을 하신 거예요. 정대철 의원이 그 시절에는 잘 나갔어요. 찰떡같이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어요. 답답한 구상 시인은 또 정 의원을 불러 다시 한 번 요청할 정도였어요.”

이렇게 노력하는 구상 시인의 이야기를 삼중 스님이 배 장관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배 장관도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금 최재만의 가석방 운동에 뛰어 들게 되었다고 한다.

“최재만의 가석방에는 배 장관의 힘으로 아주 컸어요. 무기로 감형을 받는데도 결정적인 힘이 되어 주더니, 또 가석방에도 배 장관의 힘이 뒤받침 되었죠. 배 장관은 새로 임명된 법무부 장관에게 연락했다고 해요.
 
배 장관이 장관직을 떠난 지 10년이나 지난 시절에도 그 분의 힘은 대단했어요. 우선 덕이 있는 분이라서 법무부 전체 관료들이 배 장관을 존경했죠. 그러니 현직 법무부 장관도 배 장관의 말을 정성껏 들었을 거예요. ‘최재만 가족을 내가 잘 알고 지낸다. 나를 봐서 최재만의 사면을 검토해 주기 바란다. 그 마누라가 참 안됐다.
 
나를 봐서라도 사면해 달라.’ 결국 최재만은 대통령 사면으로 가석방이 결정되었어요. 이 시절 무기형 사범이 10년 만에 사면되는 전례는 없었어요. 정치범의 경우에는 가석방이 가능했지만, 다른 범죄는 10년 만에 가석방 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죠.”

최재만이 가석방 되던 날, 천안 개방교도소 정문 앞에는 기자들이 50명 ~ 60명 정도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신문사의 기자들은 새벽부터 교도소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특종을 잡고자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침 10시 가석방 시간에 맞추어 9시부터 노모를 모시고 기다렸죠. 기다리는데 배장관이 나에게 전화를 했어요. ‘재만이가 곧 나오는 모양이죠. 나한테 올 것 같은데 절대 오지 마십시오. 헛걸음만 할 것입니다.
 
기자들이 없는 다음 날 제가 인사를 받겠습니다’하며 가석방 날의 만남을 굳이 사양했어요. 구상 시인 역시 같은 입장을 이야기했어요. 참 대단한 일을 하신 분들이 극구 그 인사를 사양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어요.
 
‘스님이 다 하신 일을 가지고 제가 왜 인사를 받아야 합니까?’ 말하는 구상 시인이나 배 장관은 멋쟁이이셨죠. 성자가 아니면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두 분은 최재만을 알기 이전에 만난 분들이지만 최재만을 통해서 더 끈끈한 정으로 맺어졌어요. 그래서 최재만에게 내가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죠.”

삼중 스님은 구상 시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구상 시인이 얼마나 최재만과 그의 아내를 사랑했는지를 옆에서 지켜본 삼중 스님은 그저 고개를 숙여질 뿐이라고 한다.
“구상 시인이 가석방으로 출옥한 아들을 위해 저녁을 사고 싶다고 했어요. 그 당시 구상 시인은 다리가 아파 걸어 다니시기 아주 불편하였어요. 그래서 여의도에 시범아파트 시인의 집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어요.
 
내가 구상 시인을 모시고 갈 요량으로 약속시간 30분 전 시인 댁에 도착해 보니, 이미 시인은 약속 장소로 떠났다고 하더군요. 6.3빌딩에 있는 식당에 한복을 멋지게 입고 앉아 계신 구상 시인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어요.
 
그 날 구상 시인의 한 제자가 참석을 했는데, 자신의 회사에 최재만을 취직시켜 주겠다는 고마운 약속까지 해주었어요. 시인이 이미 최재만 이야기를 해 놓았던 것이죠. 배 장관이 저녁 값을 내려고 먼저 일어났는데, 이미 구상 시인이 먼저 도착하셔서 저녁 값을 지불하였다고 해요.
 
이리 멋진 구상 시인은 ‘오늘은 내 자식이 형무소에서 나온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애비가 밥 한 그릇을 사야 되지 않겠습니까?’ 구상 시인의 최재만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어요. 내가 음식을 차려주는 식당 종업원에게 팁을 주자 ‘스님은 세상을 저보다 ! 더 잘 알고 계시네요?’하며 아주 멋진 저녁을 했어요.”
 
감형으로 출소한 후 사회생활
 
최재만의 두 자식은 아주 잘 성장했다고 한다. 한 아이는 인화공대 석사과정을 마쳤고, 또 한 아이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두 명의 자식 모두 효자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14년간 제가 주지로 있던 절에서 공양주를 한 최재만의 아내는 참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최재만의 가석방으로 절을 떠나는 하루 전 날, 제게 와서 그 동안 못다 했던 말을 하더군요. ‘스님, 제가 스님 한 분만 뵈옵고 14년간 살았습니다. 스님이 이 절에 있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절에는 신도들이 많은 곳이죠. 그의 아내는 뼈 깊은 말로 그 동안 아프고 괴로운 마음을 표현했던 거예요.
 
노모와 어린자식 둘, 그리고 그의 아내와 함께 한 절에서 14년간 살았어요. 내 가족이 된 거죠. 내 가족의 억울한 사연을 주변 분들에게 알리는 것이 내 생활이 되었어요. 그래서 구상 시인, 배명인 장관, 종정 스님이 저 때문에 최재만을 양아들로 받아 들였어요. 이리 큰 인물들이 한 억울한 사형수를 위해 뛰어 다녔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예요.
 
나도 미친 사람이죠. 누가 돈을 주고 사형수를 교화하라 해도 아마 하지 않을 거예요. 사형수 가족과 함께 14년간을 절에서 같이 생활하는 나도 어찌 보면 돈 사람이죠. 그래도 내가 좋아서 한 일이예요. 그들과 함?! ? 한 삶에서 살아있는 보람과 은덕을 더 많이 받았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 길을 내가 좋아하니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죠."
삼중스님은 최재만의 석방을 위해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참여를 했다고 한다. mbc 수사반장의 김수경 감독은 4월 초파일 특집극으로 최재만의 이야기를 찍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수사반장, 4월 초파일 특집극에 최재만의 억울한 내용이 나오면, 가석방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수경 감독은 최재만의 양아버지인, 저를 포함한 구상 시인과 배 장관, 그리고 서옹 종정스님 모두 드라마 출연을 하면 좋겠다고 했어요. 감독의 엄청난 욕심이었죠. 가장 멋진 작품을 찍고 싶은 마음에 막무가내로 저를 졸랐어요. 처음에는 나 역시 출연하는 것을 당연히 거절했어요.
 
감독이 더 생생한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양아버지 4명 모두 출연해야만 된다며 수차례 찾아왔어요. 할 수 없이 우선 나만 출연을 결정하고, 서옹 정종스님에 가서 설득을 했죠. 스님은 워낙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천진한 부처이시니, 내 요청에 승낙해 주셨어요."

구상 시인과 배 장관은 수사반장 출연 요청을 펄펄 뛰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두 분의 마음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다고 방송 출연을 하느냐고 출연을 완강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상 시인은 결국 가석방이 조금이라도 당길 수 있다는 말에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구상 시인에게 방송 출연을 요청한다는 말에, ‘스님, 저보고 방송에 나와서 연기를 하라고요. 그 사람들은 정상이 아녜요. 스님이 다 한 일을 내가 뭘 했다고 방송 출연을 합니까? 제가 언제 스님의 명령을 한 번이라도 거역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제가 한 일이 없어서 이번만은 거역하겠습니다.' 구상 시인의 말을 그대로 감독에게 전했어요. 그 감독의 고집도 참 대단했어요.
 
감독이 구상 시인 댁을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카메라맨은 집 밖에 대기시켜 놓았어요. 구상 시인이 감독과 함께 온 나에게 대뜸 말을 했어요. '스님, 저는 방송을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자꾸 텔레비전에 나오라고 하십니까?' 하며 화까지 내셨어요. 그래서 '시인님이 텔레비전에 나오셔야 최재만이 빨리 나옵니다.
 
노모가 당신 살아생전에 아들놈 품에 끌어안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구상 시인의 제일 가슴 아픈 구석을 알고 있으니 그 곳을 건드렸어요. 최재만의 가석방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그 고집 센 구상 시인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감독은 대기시켜 놓?! ? 카메라맨을 들어오게 해서 그대로 촬영했어요.
 
한 명 남은 배 장관에게 출연 요청을 하러 갔어요. 똑 같은 말을 했어요.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방송에 출연합니까? 단 제가 나올 장면에는 대역을 써 주십시오.'하는 간청에 배 장관은 대역으로 방송을 찍었어요. 수사반장 예고편에 서옹 정종스님을 찍은 장면이 크게 나왔어요.
 
이 예고편을 본 신도들이 정종 스님에게 방송출연을 하시면 안 된다고 했나 봐요. 정종스님이 저에게 방송출연 장면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을 하더군요. '절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내가 나온 방송 장면을 빼라고 하네. 또 총무원에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하네. 내가 찍은 방송분은 빼주게나.' 불교 사상 처음으로 드라마에 정종스님이 나왔으니, 총무원이나 신도들의 말은 많았을 겁니다.
 
내가 정종스님을 설득했죠. '정종 스님, 방송에서는 스님이 법문하시는 장면만이 나옵니다. 그 장면이 나오면 사람들이 큰 스님 참 잘하셨다고 할 겁니다. 한국 불교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방송이 나간 후 서옹 종정 스님은 칭찬의 소리를 많이 들었다면서 참 기뻐했어요.”

▲ 사형수를 살려낸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삼중 스님은 최재만이 가석방한 뒤 그들의 삶을 지켜본다고 한다. 사형수로 지낸 세월이 7년, 무기수로 지낸 세월이 10년, 사회에 나온 햇수가 10년 째, 최재만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출소한 지 2년 뒤쯤, 최재만은 자신을 고문한 경찰 책임자를 찾아 갔다고 해요. 그 경찰관은 은퇴하여 사슴농장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고 해요. 최재만의 말을 빌리자면, 최재만이 그 집으로 딱 들어서자, 부부가 이젠 죽었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딱 꿇었다고 해요. 당신을 만나는 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생각으로 살았다고 하더래요. 최재만은 독실한 불자예요. 그 경찰관을 죽이려 간 게 아니죠.
 
사회에 나온 최재만이 그 때 아마 사정이 어려웠던 시기였을 거예요. 아이들 학비 문제, 고생한 아내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어디 사회가 그런 사정을 봐줍니까? 솔직히 돈 때문에 그 경찰관을 찾아갔을 겁니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용서를 비는 그 경찰관을 보니 악연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최재만이 먼저 ‘우리 의형제 맺읍시다’ 하니 그 경찰관이 최재만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고 해요. 예전에 종정스님이 너를 고문했던 경찰관을 부처로 봐라 할 때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는데, 사회에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해요. 술을 거나?! 構? 마시고 며칠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요.”

삼중 스님에게 최재만은 자세한 이야기를 피했다고 한다.

“경찰관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에 막 들어서는데 관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대요. ‘왜 거기를 갔느냐’며 간 연유를 자세히 묻고 또 물었다고 해요. 이놈이 감정이 상했죠.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부둥켜 앉고 울면서 의형제까지 맺은 그 경찰관이 또 자신을 기만했으니 울화통이 터지죠.
 
입장 바꾸어서 나라도 감정이 상했을 겁니다. 그래서 다시 그 경찰관을 찾아 간 거예요. 그때는 시비를 걸려고 간 게 분명해요. 그 경찰관 첫 마디가 ‘너 나 죽이러 왔지?’하는 말에 최재만이 상황 판단이 나오더래요. 나를 유도하려고 저 놈이 저런 말을 하는구나.
 
그 경찰관은 이름까지 부르면서 ‘최재만, 네가 죄 없는 나를 그럼 왜 찾아 왔느냐?’하면서 큰소리를 치더래요. 이미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최재만도 돌아가는 녹음기에 기록이 잘되도록 그 동안 쌓였던 말을 쏟아 부었다고 해요. ‘지난 번 이야기와는 360도로 변했다.
 
네가 살인사건을 조작해서 나한테 덮어씌워 고문한 너를 보러 왔다. 네 놈이 조작한 내 인생은 17년간 감옥소에서 삶과 죽음?! ? 넘나들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내 인생과 내 가족의 삶을 망친 내 놈을 지켜보겠다.
 
너는 분명 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던지고 나왔다고 해요. 이 말에 내가 걱정되어서 ‘너 그 놈 죽이면 안 돼’ 했더니 ‘스님 제가 바보인가요.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도 그리 안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잘 사는지 지켜볼 것입니다’라는 뼈아픈 마음을 내게 비쳤어요.”

삼중 스님은 분명 그 경찰관은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편하게 살지 못 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최재만은 이제는 고비를 넘겨 편안한 마음을 되찾았다고 삼중스님은 대견해 했다.
“최재만 부부는 조그만 차를 트럭으로 개조했어요. 트럭에는 꽃, 수박, 야채들이 실려 있죠. 점포 얻을 형편이 안 되니 그리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팝니다. 최재만은 새까맣게 타서 눈만 말똥말똥 반짝거려요. 사회로 나와 있으니 몸과 얼굴도 많이 망가졌어요. 그래도 그는 지금 아내를 위해 열심히 삽니다.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어요. 부부간 금술이 아주 좋아요. 아내가 어디 가면 꼭 차로 데리러 온다며 아내가 자랑을 많이 합니다. 이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니 내가 더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이제는 고비를 넘겼어요. 그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잘 삽니다.” sungae.kim@hanmail.net
 

 
박상중 스님의 잊지못할 사형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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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 논설위원> 경력.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제사무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전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은행 소비금융부서 총괄담당 전 인덕대학 전임교수 전 경인여자대학 전임교수 전 팬아시아캐피탈 관리 본부장 현 인터넷신문언론인 --저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한국 금융연수원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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