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 보는 세상 읽기(24)

공부의 要諦(요체)로서 易簡(이간)

이응국 | 기사입력 2007/05/07 [13:44]

주역으로 보는 세상 읽기(24)

공부의 要諦(요체)로서 易簡(이간)

이응국 | 입력 : 2007/05/07 [13:44]
  易簡(이간)은 주역에서 나오는 말이며 乾坤(건곤)의 德(덕)으로 말한 것이다.

  易을 일반적으로 ‘역’이라 표현하지만 ‘이’로 읽는 경우도 있다. 이때의 ‘이’는 ‘쉽다’ ‘어렵다’하는 難易(난이)중의 ‘이’로서 말한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易簡(이간)도 易을 ‘역’으로 발음하지 않고 ‘이’로서 발음한다. 무엇이 ‘쉽고 간단하다(易簡)’는 말인가?

  주역 계사전에서 말하기를 ‘건곤은 易(역)의 문이다[易之門耶]’했으니 모든 괘가 건곤으로부터 나왔음을 뜻한 것이다. 또한 계사전에는, ‘저 乾(건)은 확실한 모습[確然]이니 사람들에게 쉬운 것[易]으로서 보이고, 저 坤(곤)은 순종하는 모습[隤然]이니 사람들에게 간단한 것[簡]으로서 보인다’ 말했으니, 이는 易道(역도)를 이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때문에 ‘하늘의 도[天道]가 易(이)한 즉 내가 쉽게 알 수 있고[易則易知(이즉이지)], 땅의 덕(地德)이 簡(간)한 즉 내가 쉽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다[簡則易從(간즉이종)]’했으니 이것이 바로 易簡(이간)의 법칙이다.

  그러나 천도의 易(이)와 지덕의 간단히 따르는 이치를 사람들이 과연 쉽게 알 수 있고 간단히 따를 수 있을까? 주역에서는 사람들이 만약 易簡(이간)할 수만 있다면 천하의 理(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이는 소위 得道(득도)을 의미하는 것이다. 득도하기란 쉽지는 않을 것인데 왜 옛날의 선비들이 易(역)을 ‘쉬울 이’의 뜻으로 표시했을까? 이 易(이)라는 글자 속에는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전술했듯이 易簡(이간)은 乾坤(건곤)의 덕에서 나오니 易(이)는 乾卦(건괘)의 상에서 취한 것이고, 簡(간)은 坤卦(곤괘)의 상에서 취한 것이다. 건괘는 순전히 양효만 있고 음효는 하나도 없다. 양은 實(실)하고 음은 虛(허)한 모습이니 양은 베풀고[施] 음은 받아들이는[受] 의미다. 대개 하늘이 오행의 氣(기)를 먼저[先] 베풀면 땅은 나중에[後] 오행의 기를 받아들이는 법이다. 베풀 수 있으므로 天理(천리)가 보존되고 받아들이기만 하므로 私慾(사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건괘에 순 양효만 있다는 것은 이 마음이라는 보따리 속에 천리만 남아 있다는 것이요 사욕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욕심이 깃들지 않으면 이것이 곧 득도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聖人(성인)의 모습이다. 따라서 건괘의 易(이)라는 것은 無慾(무욕)의 경지로서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욕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무욕이 될 수 있을까? 중용에서 말하는 中(중)이 바로 무욕에 이른 경지다. 중용에서 말하기를 ‘喜怒哀樂(희로애락)이 未發(미발)함을 中(중)이라 말한다’하였으니 희노애락은 耳目口鼻(이목구비)를 통해서 나온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고 말하지만 어디 눈만이 마음의 창이겠는가? 귀․입․코 모두가 마음의 창인 것이다. 마음이 이목구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곱 개의 구멍[七竅(칠규)]’을 통해서 마음이 출입하는 것이다. 즉 희로애락의 感情(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희로애락은 마음이 動(동)해서 나오는 것이므로 동하는 마음은 모두가 욕심이 된다. 욕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私慾(사욕)의 경우로서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의 정신은 본래가 물 맑듯이 맑아지기를 좋아하는 법인데 마음이 움직여서 탁해지기만 하고, 사람의 마음은 본래가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법인데 욕심이 자꾸만 끌어당기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다. 때문에 옛날의 성인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법을 가르쳤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면 우선 이목구비를 닫고 靜坐(정좌)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정좌하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옛날의 선비들은 ‘明鏡止水(명경지수)’라 불렀다. 즉 거울로 비유하자면 때하나 없는 밝고 깨끗한 거울이요 물로 비유하자면 고요히 그쳐있는 맑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건괘의 易(이)는 바로 이러한 경지에서 말하는 것이다. 아니 주역을 공부하는 마당에 웬 仙法(선법)을 논하느냐 하겠지만 공부는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속에서 공부의 길이 나오는 것이다.

  주역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간 속에서 도의 근원을 체득할 수 있듯이 역이라는 것이 무욕의 无(무)에서 근원한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視而不見(시이불견)], 들어도 들리지 않으나[聽而不聞(청이불문)], 역의 이치는 오직 无(무)의 寂然不動(적연부동)한 속에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 필자는 대전광역시 유성문화원과 학회에서 주역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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