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뭇한 참외.

수필가 박종희 | 기사입력 2007/05/01 [10:25]

흐뭇한 참외.

수필가 박종희 | 입력 : 2007/05/01 [10:25]
▲   흐뭇한 참외
   노란 나트륨등 아래 누워있는 참외가 탐스럽다. 시무룩한 참외가 불빛을 받아 흐뭇한 참외로 치장을 한 것이다. 

  딸애가 다니는 학원 앞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많다. 쪽파, 상추, 콩나물같은 야채를 파는 할머니들의 좌판이 있고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나오는 학생들을 기다리는 떡볶이와  풋풋한 과일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을 보기 때문에 과일도 마켓에서 사다 먹는데 딸애를 기다리던 시간이 남아 노점에 펼쳐놓은 과일바구니 앞에 섰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훨씬 반들반들하고 생기 있어 보이는 참외와 토마토, 파인애플, 수박등. 낮에 보는 과일보다 밤에 불빛으로 보는 과일의 색깔이 훨씬 예쁘고 먹음직스럽게 보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한, 두 걸음을 사이에 두고 과일가게가 있었지만 유독 싱싱해 보이는 노점으로 발길이 갔다. 같은 과일을 놓고 파는데도 그 집 앞에만 손님이 많았다. 이것저것 둘러보며 노랗게 윤이 나는 참외 바구니를 가리키니 주인아저씨는 대뜸, "손님 ! 참외 드릴까요? 거기  흐뭇해 보이는 놈들은 만원이고 저기 저쪽에 시무룩한 놈들은 칠천 원입니다. 손님한테는 아무래도 흐뭇한 요놈이 어울릴 것 같은데 드릴까요? "한다.

  참외를 가지고 흐뭇한 놈과 시무룩한 놈이라 하다니. 웃으면서 말하는 과일아저씨의 발상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또 한 번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여기서 매일 과일이나 팔지만 우리도 사람 볼 줄 알아요. 아무한테나 흐뭇한 참외를 권하지는 않는답니다. 흐뭇한 참외 먹을 사람이 있고 같은 참외를 먹어도 평생 시무룩한 참외 밖에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지요. " 하면서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은근슬쩍 흐뭇한 참외 한 바구니를 검정 비닐봉지에 담는다. 

  손님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 장사를 하는 판매수단이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고객의 비위를 맞추어주며 팔아서 인지 내가 서있는 동안에도 서너 명의 사람들이 와서 과일을 사 가지고 간다. 과일 아저씨 말처럼 누구에게나 흐뭇한 과일을 권하면서 같은 말을 하리라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은 과일 한 바구니를 사면서도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그 아저씨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 같다. 

   그 날 과일아저씨가 권해준 흐뭇한 참외를 가지고 와서 남편과 딸한테 이야기했더니 정말 장사 수단이 좋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했다. 한번 사다먹은 참외가 맛이 있어 일부러 다시 사러 갔다.  이번에도 아저씨가 담아주는 대로 흐뭇한 참외를 샀다. 그런데 그렇게 유능한 과일 아저씨도 때론 실수를 할 때가 있나보다. 어찌된 일인지 다시 사온 참외는 무늬만 참외이지 거의 오이수준이었다. 노랗게 빛이 나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이 다 상하고 곯아 있었다. 상한 속을 긁어내고 썰어 놓아도 맛이 없다며 남편도 딸애도 먹지 않는 참외를 먹을 때마다 악의 없이 웃던 과일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겉모습만을 보고 상대를 대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듯하게 옷을 차려입고 값비싼 보석이라도 두른 귀부인한테는 시들은 참외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일본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10년은 앞선 선진국인 일본을 여행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겉치레위주의 생활을 하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한 평이라도 더 큰 아파트에 살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에 눈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내면보다는 외형에 신경 쓰며 산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지위나 명예에 관계없이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소형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서도 급식을 하지 않아 엄마들이 매일 도시락을 싸고 스쿨버스도 없이 자전거로 아이들을 태워다 주고 데려오는 것을 보고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거리나 공원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소한 옷차림으로 단정하게 앞치마를 두른 여인네들이 양 손에는 쓰레기를 주어 담는 봉지를 가지고 다니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거리에 쓰레기통을 볼 수가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학생들의 교복도 우리나라의 60년대에 입던  단순한 제복이었다. 
 
  식당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인사를 하는 일본인들의 생활습성을 보고 어릴 때부터  듣고 배워 머릿속에 박힌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가졌던 선입관이  가셔버렸다. 사흘 동안에 내가 본 일본의 모습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그런 일본에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어떠한가. 우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고정관념을 아직도 버리지  못 하고 있다. 사소한  예로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가도 소형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에겐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주인들도 있다. 부의 척도를 곧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보는 것이다. 

  사람의 외관을 보고 단골이 될 지 뜨내기가 될 지를 가려내는 노련한 눈썰미로 매출을 올리는 과일 아저씨도 노점상이 몰린 장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상술일지도 모른다. 싱싱하고 단 참외는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퇴출되어 구조조정 당한 시무룩한 참외는 나처럼 스쳐 지나는 사람에게 팔아버리는...

  참외를 먹으며 생각했다. 잠깐 외출을 하더라도 옷을 제대로 입고 모양새를 갖추고 나가야겠다는 것을. 두 번째 참외를 사러 간 날 난 목욕탕에서 금방 목욕을 하고 젖은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 한 맨얼굴이었으니 과일 아저씨 눈에도 영락없이 집안에서 누워있다 나간 헝클어진 아줌마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참외로 치자면 시무룩한 참외인 내 모습을 과일 아저씨는 놓칠 리 없이 재빠르게 머리에 입력을 했던 것 같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흐뭇한 참외를 사러 갈 생각이다. 그땐 처음처럼 다시 옷을 챙겨 입고 화장을 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마주하리라 .
 
충북 출생.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충북여성문협회회원. 충북수필가협회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회원. 중부매일 에세에뜨락 수필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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