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삶이 오롯이 역사였구나!
온갖 수발을 들은 딸의 콧숨이 어머니의 콧잔등에 얹혔다가 되돌아 나올 땐 온기가 실리지 않았다. 가슴에서 떨어진 철렁거림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알리는 단말마였다. 적막 속에서 다가온 어머니의 타계는 방 안의 괘종시계가 부고를 대신하고 있었다.
4월 27일 새벽, 그러고 보니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이 나온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판문점 선언 한 돌을 맞아 영면의 길로 들어간 셈이다.
이 때쯤이면 고향 ‘황해도 사리원’에도 핑크빛 꽃술을 하얀 잎으로 둘러싼 능금꽃이 만발한 꽃 천지가 돼있을 것이다. 초록빛 들판에 방긋 웃는 모습의 노란 민들레가 하얀 능금 꽃밭과 보색을 맞추면 화사한 그 곳을 천국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고향의 꽃동네가 반가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너울너울 춤이라도 출 것이 틀림없다. 사실 어머니의 고향 모습은 20살 처녀 때의 꽃동네 기억으로 화석화돼 있다. 1·4후퇴 때 잠시 전쟁을 피해 내려온 뒤로 고향동네를 도통 보지 못했으니 세월이 지났어도 고향 산천은 항상 처녓적 봄에 고정된 풍경화로 남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나가면 찾아가는 곳이 거의 정해져 있는 것을 알아챘다. 대전대학교 옆의 용수산 기슭이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동산이다. 어머니는 그곳이 고향동네 뒷산 벚꽃이 많이 피는 언덕쯤으로 여기셨을테다. 치매에 의한 가출이나 배회가 아니라 온전한 고향방문이었다.
가족들은 어머니의 행동변화를 곰곰이 따져본 뒤 결론을 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만남 뉴스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새삼 고향을 방문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뒤로 가출을 하지 않았지만, 방안에서 예전과는 달리 아주 편하게 배설을 하곤 했다. 분단으로 맺힌 한을 풀어내고 있다는 듯이, 바닥에 싼 것은 푸짐했고 벽에 칠한 것은 찬란했다.
남녘의 남자와 결혼하면 통일이 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으로 생각해 반드시 북녘출신의 남자와 결혼하기로 진작부터 맘먹은 터였다. 다만, 남편이 북한에서 이미 결혼해 딸 둘을 둔 것이 꺼림칙했을 뿐. 그래도 반드시 ‘북남북녀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눈을 가렸다.
아들 딸 둘씩을 낳아 손자손녀, 증손자까지 보고 서운하지 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으니 결혼생활이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이 술에 취해 북녘의 딸들이 보고 싶다고 꺼이꺼이 울 때면, 분단에 따른 이산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 부인으로서 서운함이 없지 않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두 분은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자수성가해 중산층의 삶을 영위했다. 그것이 오히려 북녘의 부모형제나, 남겨두고 온 자식들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여러 이유로 고생하는 그들을 제쳐두고 나만이 호의호식하고 지내는 것 같아 면목이 없었다는 것이다.
재산을 일구었어도 부동산이나 주식에 묻어두기보다 주로 금붙이나 패물로 간직한 이유를 자식들은 뒤늦게야 알았다. 고향에 돌아갈 때 간편하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고향에 가고 싶었던 두 분을 배려하면 천안보다 더 북쪽에 음택을 마련하는 것이 도리지만 자식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더 올라가지 못했다. “새로운 길이기에, 또 다 함께 가야하기에 때로는 천천히 오는 분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판문점 선언 한 돌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전한 메시지가 꼭 두 분의 영혼이 고향 가는 길을 밝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아 유족들에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북쪽 고향풍습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 북에 두고 온 부모형제들을 생각하는 혈연공동체 의식의 소산이기도 했으리라. 또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고향으로 가기 위한 간편한 식사방법의 훈련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대전 고유의 음식을 제대로 대접한 것이 별로 없다. 양반삼계탕, 돌솥밥, 설렁탕, 숯골 냉면, 민물고기 매운탕, 구즉 도토리묵 등 ‘대전 6미’가운데 맛조차 보여드리지 못한 것들도 있다. 이제 제사상에 올려본다 한들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실 지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그분들의 2세 대부분도 이런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과 대동소이하고, 행동습관도 비슷했을 것이다. 분단의 멍에를 한 몸에 짊어지고 현대사의 질곡을 헤치며 살아온 모습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70년 고통의 세월을 하나하나 산화시키지 못하고 하얀 철쭉처럼 응어리진 한을 어찌할지 모른 채 꽃봉오리 뚝 떨어지듯 그렇게 떠났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남북정상들이 일궈낸 판문점 선언 1주년에 영면에 들어가신 일일 것이다.
이렇듯 한 어머니의 생이 온전한 하나의 역사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비극을 푸는 해원굿이 빠른 시간 안에 열리기를 기원하며, 내 친구 어머니, 고 차선녀 여사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빈다. 어머니, 편안히 주무십시오.(2019. 4. 30. 전 대전광역시 일자리특별보좌관 손규성 쓰다) <저작권자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