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민주화운동 도시로 꽃피운 ‘3·8민주의거’
정부는 지난해 10월 1960년 대전지역 고등학생의 민주화 투쟁을 ‘3·8민주의거’로 명명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와 함께 국가지명위원회는 ‘3·8민주의거 기념탑’이 들어선 서구 둔산동 둔지미공원을 ‘3·8의거 둔지미공원’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도록 조처했다.
이로써 대전지역 학생민주화운동은 그 의의와 정신이 공인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3·8민주의거는 충청권 최초의 학생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시위학생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정치·사회적 구호를 외치자 이승만 독재정권은 기마경찰 등의 무장경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학생과,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온 교사 등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력경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전지역 4개 고교 학생대표 24명을 붙잡아 갔다.
평화적 시위에 경찰의 폭압적 진압이 계속되자 10일에는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600여명이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는 추가시위로 맞섰다. 자유와 정의를 향한 고교생들의 열정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이런 민주화 시위는 4월 19일을 거쳐 4월 26일까지 지속됐다.
사실 그동안 대전은 자유와 정의, 민주와 통일 등의 보편적이거나 때로는 진보적인 가치구현을 위한 지역차원의 집합적 권리요구와 쟁취행위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민주화운동 면에서는 침묵을 지켰거나 다른 지역의 투쟁성과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지역민들은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충청인 특유의 겸양정신으로 이런 일들을 스스로 크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를 뒤바꿔 놓은 것이 바로 ‘3·8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이다. 대전은 민주화 운동기에 잠자고 있던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위한 변혁적 가치와 이상을 추구한 젊은 도시라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내준 것이다.
실제로 국가기념일을 가진 도시는 대전을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마산 등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이제 대전은 타 지역 못지않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기풍을 가진 도시로 우뚝 서게 됐다.
이는 결국 4월 19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에 이르게 한 징검다리가 됐다. 4월 혁명의 시발점이나 완성의 정점에 있지 않았지만 도도한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59년만의 국기기념은 마른 장작의 강력한 화력 같은 화려함은 부족할지 몰라도 솔가지에 붙은 화염의 은은함을 칭송하는 것이리라. 밥을 짓는 부엌 아궁이에서 장작과 청솔가지는 그 역할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6월 13일 충남대생 등 대전지역 대학생 1만여 명이 중앙로로 들이닥쳤다.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 군부독재 타도” 등의 구호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지역에서 항쟁이 다시 점화되면서 군부독재 타도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게 됐다. 이때도 대전은 전국의 민주화 투쟁을 연결하고 촉발하는 허리역할을 했다. 마치 ‘역사에 대전만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도 한 목소리로 분노할 수 있었다. 16~17살에 불과한 어린 고교생들의 이상은 놀랄 정도로 크고 높았다. 학생들은 부정부패는 망국의 길이라는 것을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그들은 6·25 전쟁의 상처를 딛고 대한민국이 교과서에 나온 인류 보편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나라이기를 갈구했다. 새 시대 새 나라 건설에 그만큼 목말랐다는 것을 보여줬다.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이런 이상과 가치가 대전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과제임을 일러주고 있다.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이 되면서 ‘민주화 역사에 대전의 자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지만, 21세기 대전에게는 의거가 추구한 고귀한 이상과 가치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 또한 안겨주고 있다.(2019. 3. 5. 전 대전시일자리특별보좌관 손규성 쓰다) <저작권자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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