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민주화운동 도시로 꽃피운 ‘3·8민주의거’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 기사입력 2019/03/06 [15:31]

대전을 민주화운동 도시로 꽃피운 ‘3·8민주의거’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 입력 : 2019/03/06 [15:31]
▲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김정환 기자

대전을 민주화운동 도시로 꽃피운 ‘3·8민주의거’

오는 3월 8일은 국가가 대전광역시에서 일어난 고등학교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기념식을 처음으로 갖는 날이다.

이날 대전시 서구 둔산동 대전광역시청 남문광장에서는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정부 주관의 ‘3·8민주의거’ 기념식이 열린다. 국가 주도의 공식 기념식이 열리기는 1960년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 이후 59년만의 일이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1960년 대전지역 고등학생의 민주화 투쟁을 ‘3·8민주의거’로 명명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와 함께 국가지명위원회는 ‘3·8민주의거 기념탑’이 들어선 서구 둔산동 둔지미공원을 ‘3·8의거 둔지미공원’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도록 조처했다.

 

이로써 대전지역 학생민주화운동은 그 의의와 정신이 공인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3·8민주의거는 충청권 최초의 학생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3·8민주의거는 1960년 3·15 정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기 1주일 전인 3월 8일 대전고교생 1000여명이 학교교정을 빠져나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 부정부패, 인권유린, 학원통제 등을 규탄하는 거리시위로부터 시작된다.

 

시위학생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정치·사회적 구호를 외치자 이승만 독재정권은 기마경찰 등의 무장경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학생과,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온 교사 등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력경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전지역 4개 고교 학생대표 24명을 붙잡아 갔다.

 

평화적 시위에 경찰의 폭압적 진압이 계속되자 10일에는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600여명이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는 추가시위로 맞섰다. 자유와 정의를 향한 고교생들의 열정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이런 민주화 시위는 4월 19일을 거쳐 4월 26일까지 지속됐다.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의 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대전광역시의 도시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 의미가 있다. 대전이 과학기술도시, 특허도시, 교통도시 등 기존의 정체성에 ‘민주화운동 도시’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공인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대전은 자유와 정의, 민주와 통일 등의 보편적이거나 때로는 진보적인 가치구현을 위한 지역차원의 집합적 권리요구와 쟁취행위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민주화운동 면에서는 침묵을 지켰거나 다른 지역의 투쟁성과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국가기념일 지정에서 보듯 그런 평가나 지적은 잘못된 편견이나 선입견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전의 역할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현대사의 물꼬를 바꾼 더 큰 변곡점에 가려 대전의 역할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지역민들은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충청인 특유의 겸양정신으로 이런 일들을 스스로 크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를 뒤바꿔 놓은 것이 바로 ‘3·8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이다.  대전은 민주화 운동기에 잠자고 있던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위한 변혁적 가치와 이상을 추구한 젊은 도시라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내준 것이다.

 

실제로 국가기념일을 가진 도시는 대전을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마산 등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이제 대전은 타 지역 못지않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기풍을 가진 도시로 우뚝 서게 됐다.

3·8 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나라의 틀을 바꾼 거대한 변혁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3·8민주의거는 직전에 일어난 2·28 대구학생의거의 불씨를 살리면서 3·15 마산의거로 이어지게 했다.

 

이는 결국 4월 19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에 이르게 한 징검다리가 됐다. 4월 혁명의 시발점이나 완성의 정점에 있지 않았지만 도도한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59년만의 국기기념은 마른 장작의 강력한 화력 같은 화려함은 부족할지 몰라도 솔가지에 붙은 화염의 은은함을 칭송하는 것이리라. 밥을 짓는 부엌 아궁이에서 장작과 청솔가지는 그 역할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징검다리 역할은 1987년 6월 항쟁에서도 재현된다. 1987년 6월 10일 100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고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세상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신군부독재 세력과 시민세력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숨고르기를 하듯 팽팽한 대치에 들어갔다.

 

6월 13일 충남대생 등 대전지역 대학생 1만여 명이 중앙로로 들이닥쳤다.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 군부독재 타도” 등의 구호가 쩌렁쩌렁 울렸다.


충남대생들의 기세는 유성 대학정문을 나와 시내 진입을 시도하면서 이를 막던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발사차량 2대를 불태운 뒤여서 거칠 것이 없었다. 이날 시위는 다른 지역에 던진 섶 무더기였다. 다음 날 부산에서 군부독재 타도의 횃불이 다시 타올랐고, 그 다음 다음날에는 광주로 화염이 옮겨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지역에서 항쟁이 다시 점화되면서 군부독재 타도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게 됐다. 이때도 대전은 전국의 민주화 투쟁을 연결하고 촉발하는 허리역할을 했다. 마치 ‘역사에 대전만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3·8민주의거 참가학생은 인문계와 실업계 고교를 모두 망라했다. 대전지역 고교는 모두 연합해 참여하는 연대감을 보였다. 처음 거리시위에 나서기는 대전고교생이었지만, 나중에 대전상고생들이 뒷받침하듯 거리를 점령했다. 나머지 학교도 참여결의를 했지만 사전 정보가 누설돼 교육당국과 경찰의 통제 등으로 학교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심리적 참여로 힘을 보탰다.


이런 고교생들의 세력화는 학교의 명성과 이력을 따지는 기성의 학력(學歷)에 구애받지 않는 연대감과, 배운 대로 실천하는 학력(學力)에서 비롯됐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정의를 한마음으로 부르짖으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에 항거할 수 있었다.

 

또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도 한 목소리로 분노할 수 있었다. 16~17살에 불과한 어린 고교생들의 이상은 놀랄 정도로 크고 높았다. 학생들은 부정부패는 망국의 길이라는 것을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그들은 6·25 전쟁의 상처를 딛고 대한민국이 교과서에 나온 인류 보편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나라이기를 갈구했다. 새 시대 새 나라 건설에 그만큼 목말랐다는 것을 보여줬다.

3·8민주의거는 지역과 학생들의 은근한 자긍심을 키워 대전출신 후학들이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하는 자양분이 됐다. 엄혹한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신군부 독재시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민주화에 투신한 민주화운동가를 많이 배출했다. 안양로, 김정남, 강구철, 오원진 등이 서울지역과 대전에서 활동한 운동가들이다. 이렇듯  3·8민주의거는 때로는 옥살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기도 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그 정신을 이어왔다.
 
이제는 그날 외친 함성의 가치와 이상이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 실현되고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아쉽게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부분은 미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민주의 가치신장은 높아졌지만 정의로운 세상은 아직 멀었다. 부정과 부패의 늪은 건너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이런 이상과 가치가 대전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과제임을 일러주고 있다.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이 되면서 ‘민주화 역사에 대전의 자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지만, 21세기 대전에게는 의거가 추구한 고귀한 이상과 가치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 또한 안겨주고 있다.(2019. 3. 5. 전 대전시일자리특별보좌관 손규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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