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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정사의 국가사적 문화재 추진을 환영한다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남간정사의 국가사적 문화재 추진을 환영한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에 있는 에도막부 말기 학교 건물이다. 무사이며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1830~1859)’이 근대화 문물과 사상을 가르쳤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일본은 이곳이 근대화 모체가 된 인물들을 양성한 곳이라고 해서 1922년 국가사적으로 지정했다.

 

2015년에는 메이지유신을 통한 일본 산업혁명을 이룬 곳이라며 ‘큐슈-야마구치 일원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군함도’로 더 알려진 큐슈 나가사키현 하시마 탄광이 1940년대 조선인 강제징용이 대규모로 이뤄진 사실을 들어 등재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났으나, 쇼카손주쿠에 대해서는 부당성을 거의 지적하지 못해 일본 주장대로 보편적 인류자산으로 인정받았다.

쇼카손주쿠는 19세기 중엽부터 일본 근대화를 이끈 상징적 인물들을 대거 배출해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근대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보면 ‘한국 침략의 모태’였다. 요시다 쇼인은 이곳에서 일본 젊은이들에게 한국을 정벌해 국가적 이익을 취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을 가르쳤다.

 

“무력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조선을 책하여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일대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실행에 옮긴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에는 조선통감부를 세워 한국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청일전쟁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지냈고 천황의 군대가 돼야 한다는 칙어를 발표해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그 중의 하나다.

 

이들은 모두 두 차례 이상 총리를 지냈다. 따라서 쇼카손주쿠는 일본 근대화의 산실이기에 앞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뼛속 깊이 주입시킨 ‘우익의 뿌리’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실제로 현 아베 일본 수상은 이곳을 자주 방문할뿐더러,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대전시는 조선 중기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동구 가양동의 남간정사(南澗精舍)를 국가사적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 때 능인암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숙종 9년(1683)에 능인암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많은 제자를 기르고 자신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남간정사는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 조선 시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로, 현재는 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돼 있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남간정사의 대청마루 밑을 통해 연못으로 고스란히 흘러가도록 한 건축양식과 정원조성 방식은 압권이다.

 

국가사적은 역사적으로 특별히 기념될 만한 지역과 시설물 중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를 선별해 지정한다. 대전에서는 1991년 제355호로 지정된 계족산성이 유일하다.

남간정사의 국가사적화를 반기는 것은 아름다운 풍광과 건축양식의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남간정사와 쇼카손주쿠는 기본적으로 사설 교육기관이다. 하지만 똑같이 국가 또는 유엔의 사적으로 지정되기에는 ‘문화재 내력’이 다르다.

 

전자는 성리학을 통해 군자가 되는 것, 즉 완성된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학문연수 기관이다. 후자는 일본의 국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남의 나라를 침략해 약탈하는 논리를 주입하고 그 방법을 강제하는 교육기관이었다. 남간정사는 교육보편화 논리와 함께 인륜적으로 정의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침략의 산실을 목표로 한 쇼카손주쿠의 문화재 내력과는 비교할 수 없다.

1998년 6월 미국 박물관 관장회의는 문화재의 관련기록과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이른바 ‘워싱턴 원칙’을 채택했다. 워싱턴 원칙은 나치의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가이드를 제시했다. 문화재 조성경위, 역대 소유자, 반출 및 취득경위에 관한 일련의 기록을 공개하도록 했다.

 

문화재를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970년대 이래 문화재 분야에 대거 진출한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개개 문화재의 시각적・미적・예술적 가치 추구이외에도, 역사와 문명의 근원을 밝히는 지식으로서의 문화재 가치를 더욱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문화재와 그것이 기원한 원장소의 맥락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사적화 추진을 계기로 남간정사를 자연과 사람, 그리고 건축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다시 보게 된다. 문화재는 미적 예술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자연친화적이냐 도 중요하다. 문화재의 기원과 맥락이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추구에서 출발했다면 그 건축물의 지향성은 결코 반자연적일 수 없다.

 

아파트와 같은 현대의 구조물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건축은 먼 경치를 빌려오고, 가까운 풍경을 도입하고,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방법으로, 자연을 집 안에 끌어들이고 집이 자연의 일부가 되게 했다.”(김서령,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2010). 자연에서 찾아낸 비례와 균형으로 자연적 정감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건축이 취하는 지향성이라는 것이다.

남간정사는 산과 집과 물이 서로 의지하고 속삭이듯 자연스럽다. ‘자연과 조화’라는 한국 건축의 중심 사상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다. 주자의 시구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따온 남간정사의 ‘남간’은 “양지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의 뜻이니, 당호에서도 그림 같은 주변풍광이 그려진다.

 

국가사적화 추진이 가능한 것은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반도덕적이고 반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강학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남간정사와 쇼카손주쿠의 문화재 이력은 이렇듯 다른 것이다.

“건축은 필요에 의해 시작되지만 건축의 주인이었던 사람과 그가 요구했던 필요와 상관없이 도시의 부분으로 영구히 남는다.”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도시계획자인 김석철(1943~2016)은 그의 책 <만인의 건축 만인의 도시>에서 이렇게 지적하며, “도시를 자연과 인간공동체와의 찰진 교류에서 비롯된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간정사의 국가사적화 추진은 도시의 영원성,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남간정사는 17세기 후반에 지어져 오늘날까지 40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전이 천년도시로 가는 주요한 증거물이다. 이곳 대전이 과거 수백 년 전에도 사람이 모여 살았고 그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유산인 것이다.  국가사적으로 승격시켜 계속 보살피겠다는 것은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프로젝트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남간정사는 일본의 쇼카손주쿠와는 문화재 내력에서 비교할 수 없는 인류의 도덕성과 보편성을 가진 민족적 사적이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으면 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여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인 활용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후손들이 잘 모르는 우암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했으면 한다.

우암 송시열은 대유학자답게 사대와 성리학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완강하고 교조적이었다. 그러나 <송자대전>을 보면 수구적이고 반개혁적인 인물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혁신적인 사고를 보인 것도 많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지적이다. 현대적 용어로 하면, 페미니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우암은 아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출근과 외출 뒤에는 아내와 서로 큰절로 맞절을 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교육을 중시했다. 여자도 사람대접 받으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교육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글애용자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맏손자 며느리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은 <우암계녀서>도 있다. 그의 여군창설 주장대로 실제 여포수 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인권론자이면서 개혁론자이기도 했다. 서자에게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부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놓은 건 너무 잔인하다며 부녀자들의 재혼 허용을 주창하기도 했다. 노비제도의 완화도 주장했다. 굶는 백성이 많을 때는 왕이 덜 쓰면 된다며 왕의 금고인 내수사 폐지주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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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19 [17:54]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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