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머리 영웅들의 뿌리는 한밭이다!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 기사입력 2018/12/11 [15:00]

화살머리 영웅들의 뿌리는 한밭이다!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 입력 : 2018/12/11 [15:00]
 
▲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김정환 기자 
화살머리 영웅들의 뿌리는 한밭이다!

2018년 2월 27일치 <한겨레신문>은 한 예비역 소장의 궂긴 소식을 담담하게 전한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김웅수(金雄洙) 예비역 육군 소장이 25일 오후 8시51분 별세했다. 향년 95세. 고인은 해방 뒤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2사단장, 6군단장을 지냈고 1961년 5·16쿠데타에 반대해 1년여 투옥되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디시 가톨릭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한 그는 훗날 귀국해 고려대·연세대 초빙교수와 건양대 교수로 재직했다.”
 
이 부음은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에서 남서쪽으로 3㎞ 떨어진 강원도 철원읍 대마리 일대 해발 281m ‘화살머리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가 ‘살아있는 실화(實話)’에서 ‘신화(神話)적인 역사의 장’으로  넘어감을 알리는 파발마였다. 나아가 화살머리 고지가 한반도 평화의 밑돌이 될 것을 예고하는 전조등이었다.
 
1953년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다. 사단장 김웅수 준장이 이끄는 한국군 2사단은 프랑스군과 미군의 뒤를 이어 화살머리 고지 방어임무를 맡는다.
 
중공군 73사단은 백마고지 공략이 성공하지 못하자, 백마고지 옆의 화살머리부터 먼저 점령하기로 하고 대공세에 나선다. 30살의 열혈청년 김 사단장은 중공군 공격행렬의 옆구리를 치는 작전 등으로 30여회에 걸친 공세를 막아내고 화살머리를 지켜낸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1300명의 주검을 남기고 물러난다. 2주 뒤 휴전협정이 조인된다.
 
화살머리 전투의 승리는 군사적으로 매우 큰 결과를 안겼다. 철원평야를 확보하는데 그친 게 아니었다. 서부전선과 중동부전선의 각급 부대를 잇는 군 작전도로를 안전하게 확보했다. “이 도로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은 후방으로 40㎞ 이상 물러나야 했다.”고 한 한국전쟁 전문가는 평가했다. 이는 화살머리 고지 전투가 왜 치열했던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국군 2사단은 180명의 전사자와 16명의 실종자, 771명의 부상자를 바쳐 현재의 휴전선을 획정케 한 것이다.
  
1946년 2월 28일 대전시 서구 둔산동일대 대전비행장에서 조선경비대 제2연대가 창설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건군사(建軍史)>는 제2연대는 미군정의 한국군 전력강화정책인 뱀부(Bamboo)계획에 따라 남한에서 각도별로 1개씩 창설된 조선경비대 8개 연대 가운데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한때 대전지방보훈청 앞 둔지미공원에 제2연대 창설 기념표지석이 자리하기도 했다. 제2연대는 47년 12월 두 개 연대를 충원해 제2여단이 되고, 49년 5월 사단으로 승격돼 2사단이 된다.
 
화살머리 고지에서 싸운 ‘노도부대’가 대전에서 창설한 바로 그 2사단이다. 부대창설 당시에는 모병관이 나와 현지에서 장병들을 모집했다는 군사전문가의 증언으로 보아, 2사단 장병에는 대전과 충남 출신들이 많이 포함됐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화살머리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단장 김웅수도 충남 논산출신으로, 현재 계룡시에 사당이 있는 사계 김장생의 후손인 광산 김씨 혈족이다. 살아서 신화적인 전쟁사를 쓴 용사들의 뿌리는 한밭인 것이다.
 
전쟁이 멈추고 65년의 세월이 지난 요즈음 화살머리 고지에는 남북한 병사들이 만나 악수를 한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화해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전쟁이 끝나 포성은 멈췄지만 군사분계선에 위치한 탓에 수습 못한 당시 숨진 유해들을 공동으로 발굴하기 위해서다.
 
공동발굴은 남북한 병사들의 일손이 합해져야 가능하고, 당국의 합의가 지속돼야 성공할 수 있다. 교류와 협력, 화해의 단어가 화살머리 고지에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화살머리에는 북한군의 유해는 없다. 당시 전투에 북한군은 참전하지 않았다. 거기에 묻힌 유해는 중공군과 싸운 한국군을 비롯한 미군과, 야트막한 산이 남쪽으로 흘러내린 지형이 화살촉을 닮았다고 해서 ‘화살머리’라는 이름을 붙인 프랑스군의 유해가 있을 뿐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북한 당국은 비무장지대 유해 발굴 첫 대상지로 화살머리를 선정했다. ‘첫’ 공동 유해 발굴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상징성이 있는데도, 유해가 거의 없을 것이 확실한 북한이 이에 동의했다.
 
북한은 군사분계선 안 북한쪽 도로개설 현장에 이른바 ‘정주영 포클레인’도 배치했다. 이 포클레인(굴착기)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방북하면서 전달한 민간교류의 산물이다.         
 
북한은 남북이 함께 어울려 더불어 살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교류와 협력을 하게 되면, 정주영 포클레인처럼 그 결과물이 평화의 중개물이나 도구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또 화살머리에서 발굴 수습되는 유해는 한국을 제외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국적이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종전선언이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요 나라의 공통 관심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공표한 <4·27 판문점 선언>의 다른 표현이다.
 
남북 공동 유해발굴의 첫 대상이 화살머리일대가 된 것은 그 전투에서 산화한 한밭 후예들의 덕분이다. 그들은 이처럼 살아서는 신화의 전쟁사를 쓰더니, 죽어서는 냉전의 걸림돌을 밀어내고 남북 화해와 협력, 공존의 평화시대를 이끄는 산파역을 하고 있다.
 
아직 안식처를 못 찾은 영혼들은 유해 발굴 현장에서 오가는 남북한 병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의 뿌리인 대전과 충남이 남북 공존번영을 위한 선도적인 역할에 나서길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 손규성 전 대전시일자리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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