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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좋다 <5> 대전의 건축II
질속의 근·현대사, 그 아픔까지 보듬자
 
송용길 대전평생교육진흥원장


시인은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그동안 우리는 대전에 살면서 얼마나 대전에 대해 오래 보았고, 얼마나 자세히 보아왔던가. 삶의 터전인 우리의 대전. 이제부터 그 정체성을 찾아보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하자. 그래서 더욱 살기 좋은 도시로 발전시켜 나아가 보자는 취지로 매주 수요일 ‘대전이 좋다’를 2부에 걸쳐 총 20회 연재한다. 두 번째 순서로 ‘대전의 산과 하천II’ 을 소개한다.

<5> 대전의 건축II

질속의 근·현대사, 그 아픔까지 보듬자

적산건물·6·25 학살지 ‘혐오 안 돼’ … 역사발전 교훈의 장 삼아야

건축물은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소박하고 개성있는 고건축물들이 후학 양성과 정치 중심지로서 대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면, 근·현대 건축물들은 질곡의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한다. 그 중에는 일제강점기 때 수탈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도 있고, 본래 용처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의병의 날, 현충일, 6·10항쟁, 연평해전, 6·25전쟁을 기억하는 날들로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며 마음을 겸허하게 가지는 달이다. 이제 우리 대전에서 순국선열의 위국헌신과 아물지 못한 역사의 상처를 보듬고픈 마음에서 역사적 상흔이 남아있는 3곳을 들여다 본다. 

옛 충남도청은 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이다. 1932년 공주에 있던 도청을 대전으로 옮겼다. 이전 계획 발표 당시 공주 지역주민들의 극렬 반대에 부딪치자 일제는 도청을 이전하는 대신 사범학교와 금강철교를 선물로 주겠다며 주민들을 어르고 달랬다.
 
그것마저 불안했던 침략지배자들은 주민들의 관심이 잠시 진정된 틈을 타 얼른 도청을 서둘러 이전시켰다. 요컨대 충남도청의 이전은 1904년 88명의 이주민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일본인 유입인구의 다목적 편의를 증진시키고자 강행한 일종의 식민통치 정책이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옛 충남도청 -대전시 DB 제공     © 윤여범

 대전에 도청이 들어서게 되자 도시 인구가 급증하였다. 그에 따라 대덕군청과 대전경찰서가 신축되고, 지금의 중앙로가 대전발전의 중심축이 되었다. 동시에 신문물의 급격한 유입으로 기호학파의 중심지와 예학의 본고장이라는 전통적인 대전의 본래적 가치가 퇴색되는 듯하여 현재 대전의 역사가 100년밖에 안 된 신흥도시라는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대전에는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건축물과 일본식 가옥이 다소 남아있다. 이들 건물은 일제가 침략자의 위상을 과시라도 하듯 최고의 자재와 최신 공법으로 설계·건축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사적·시대적 특성 상 보존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1919년 3월 6일 장날, 쌀과 가마니를 팔던 인동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만세운동은 장날마다 이어져 천동 뒷산과 보문산에서는 횃불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대전에서 일어난 민족의 외침은 그 해 5월까지 지속되었다. 잔악한 일제는 독립투사들을 지속적으로 체포·구금하였고, 급기야 서울의 서대문형무소가 수용한계에 도달하자, 대전으로 내려와 중구 목동에 대전형무소를 만들어 이들을 이감하고 새로 수감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박헌영 등의 인사를 수감하였고, 근래에는 3공 때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이응노 화백, 유신 때 긴급조치 위반으로 죽천 송좌빈 선생 등도 이곳에 수감되었었다. 

일제가 패망하여 민족은 해방되었지만 이념 갈등의 대립과 비극이 도사리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대전형무소가 바로 그 비극의 현장이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북한군이 승기를 잡을 때면 반공인사들이, 유엔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을 때면 북한군 부역자들이 수감되었다. 곧바로 좌익이든 우익이든 엎치락뒤치락 살 떨리는 증오와 분노의 처형이 교차되었다.
 
휴머니즘이나 이성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학살이 시작되면 단시간에 시신처리를 쉽게 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역사적인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우물에 집단으로 밀어넣고, 온실에 몰아넣어 총살을 하고, 구덩이를 파서 윗쪽을 바라보게 하고 총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학살의 현장은 종교시설에서도 일어났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는 1921년 세워진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이다. 중세 유럽 고딕 양식으로 뾰족한 첨탑이 있는 이 성당은 청빈한 신앙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성당이 6·25 전쟁 때 인민군치안본부로 쓰이면서 수백 명의 양민을 비롯하여 심지어 아일랜드 선교사 2명까지 순교당한 비극의 현장이 됐다.
▲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 전경 -대전시 DB 제공     © 윤여범
 
▲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 -대전시 DB 제공     © 윤여범
 현재 대전형무소는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주했지만 민족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있던 망루가 보존되어 있다. 

▲ 대전 형무소 망루 -대전시 DB 제공     © 윤여범

 성당은 희생된 양민들의 선혈이 외벽에 낭자하여, 외벽을 덧칠하는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아 페인트로 다시 도장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예수상이 성당을 지키고 있는데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를 진 예수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잔혹함과 증오심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인지. 

‘서로 사랑하면 살 것이요, 서로 싸우면 죽으리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다. 주권을 상실한 일제식민지 시대의 적산건물들, 민족의 수치와 치욕, 분노와 증오를 안고 있는 장소라 해서 무조건 외면할 것만은 아니리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처럼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장소로, 역사의 교훈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간으로 잘 보존하고 활용하는 차원높은 자세가 필요하리라. 6월 호국보훈의 달에 대전에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글쓴이 송용길 대전평생교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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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6/30 [10:15]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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