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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아닌데 억울하게 사형 당한 사형수
 
김성애 논설위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서 사형제 폐지운동에 불을 댕겼던 사형수 트로이 데이비스는 결국은 조지아 주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미국시각 9월21일 밤 11시 8분)이 되었다. 20년 전부터 43살까지 줄곧 주장했던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이제 그의 마지막 유언으로 남게 되었다.
 
다시금 사형제 존폐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미국 전역을 달구고 있는 가운데 사형 집행장에 참석했던 참관인이 전한 ‘사건을 더 깊게 조사해서 반드시 진실을 찾아 달라’는 말은 데이비스의 사건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데이비스 사건은 22년 전인 1989년, 노숙자를 돕고 있던 데이비스가 총으로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지 2년 만에 사형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범죄에 사용되었던 총에서 데이비스의 DNA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범인이라는 법정 증언을 했던 목격자들 7명은 경찰의 강압으로 거짓 증언을 했다며 진술을 번복했지만 여전히 사형수의 족쇄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갇혀 있는 20년 긴 세월동안에 국제인권단체 등에서 벌인 구명운동 덕택에 무려 4차례나 사형 집행을 미룰 수 있었다. 또한 2007년 6월, 데이비스에게 재판 기회를 추가로 부여했던 연방대법원에서도 충분한 증거가 없다며 사형 판결을 번복하지 않아서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데이비스의 사형 집행은 사형제도에서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인 억울한 죽음에 대한 논란에 해답을 찾아내려는 사형제 폐지 논쟁에 횃불을 높게 치켜들었다.

번복되는 증인 진술의 허상

트로이 데이비스의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검거된 직후부터 데이비스는 총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현장 증인들 9명이나 데이비스가 총을 쐈다는 증언으로 1991년 8월 데이비스는 사형수가 되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는 데이비스의 주장에 변호인들은 끊임없이 20년 동안 사형 집행을 막아가면서 연방대법원에까지 재심을 청구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법정에서 데이비스에 불리한 주장을 한 증인 9명 가운데 2명을 제외한 7명은 자신들의 증언을 뒤집거나 자신의 진술을 증거물에서 빼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경찰의 강력한 압력 행사로 인해 법정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정황까지 밝혔다.
 
또한 진술을 뒤집지 않은 2명 중에서 1명이 살인 사건의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새로운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형 판결을 뒤집지는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검찰측에서 내린 초기 수사의 결과물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현행 재판부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데이비스측의 변호인들은 지적했다.
 
“살인범이 아닌 억울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무서운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변호인단의 이의 제기는 10여 차례나 넘게 반복되는 동안 데이비스의 사건은 미 전역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무려 66만 명이나 되는 일반 사람들이 데이비스의 사형 집행을 취소시켜 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하면서 마지막 떠나가는 데이비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데이비스가 수감돼 있는 곳이자 사형집행 장소인 조지아 교도소 앞에서, 같은 시간에 마지막 심사를 하는 워싱턴 D. C에 있는 연방대법원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데이비스에게 생명을, 정의를….”

연방대법원은 ‘데이비스가 살인범이 아니라고 볼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서 2007년 6월에 최종적으로 데이비스의 사형을 확정지었다. 데이비스의 원래 사형집행 시각이었던 저녁 7시, 다른 지역 텍사스 주에서는 트럭 뒤에 흑인을 묶어놓은 채 3마일(5킬로미터) 이상을 달려 숨지게 한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이 사형집행이 되었다.
 
미국 언론의 조명은 이미 데이비스에게 모두 빼앗긴 상황이었으니 백인 사형수의 집행 소식은 아주 짤막하게 전달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최고급 식사를 하면서 가족과 친구들과 마지막 통화를 하도록 허용되었다는 한 줄이 전부였다. 이렇듯 데이비스의 사형과 다른 백인이 사형 집행이 되면서 모든 절차가 끝나는 듯했지만 많은 의혹과 의문점들은 여전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서 데이비스 집행에 대해 강하게 주장했다.

“이번 사형집행은 미국의 사형제도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낡아빠진 제도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일을 하도록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더불어 데이비스를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었던 많은 시민들도 각오를 펼쳐 보였다.

“우리의 투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2, 제3의 데이비스가 나오지 않도록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국가를 대표하는 미국에서 여전히 이어나가는 사형집행은 매년 세계에서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 뒤이어 4번째라는 통계가 나왔다. 합법적인 살인제도를 국가에서 자행하고 있다면서 규탄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보복이나 복수차원이 아닌 정의의 집행이라는 명목이 사형수에 의해 유린당한 피해자의 목숨과 존엄이라는 시각으로 아직까지 치중하고 있다. 단지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하는 사형수에게 조금이라도 의문점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아야 하는 기대치는 세계 어디서나 같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 최근에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대만에서 발생했다. 대만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14년 전에 집행했던 사형수의 억울한 생명 앞에서 정중히 사죄를 고했다. 1997년, 21살 공군 사병 장궈칭은 고문에 견디지 못한 끝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백으로 ‘총살’형을 당했다. 피맺힌 어머니가 끈질기게 재수사를 요청함으로써 결국에는 무죄로 판명하기에 이르렀다.
 
사형 집행장에서 떠난 아들의 영정을 품에 안은 채 어머니 왕차이렌은 피눈물을 흘렸다. 1996년, 공군 작전사령부 영내에서 성폭행당한 채로 살해당한 5살 소녀의 용의자로 장궈칭이 체포되었다. 재판장에서 앞선 진술을 뒤집으면서 고문으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자백했다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성범죄 건으로 전과가 있던 쉬룽저우라는 사병은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자백마저 완전히 묵살해 버렸다. 1997년 8월, 장궈칭에 대한 총살형은 14년이 지난 2011년 10월13일, 대만 군사법원은 그가 당시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판결로 뒤집어졌다. 고귀한 한 청년의 억울한 죽음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대만에서도 사형제에 대한 논란에 불을 붙였다. 14년 전에 이미 잊혀져 버린 사건을 되살린 배경은 아들의 억울함을 씻어내려는 부모의 끈질긴 노력과 희생이었다.

부모는 14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재수사를 요청함으로써 대만 검찰원은 2010년부터 재수사를 진행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14년 전 범행을 자백했는데도 처벌받지 않은 쉬룽저우가 용의자로 체포되면서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도 바닥을 치게 만들었다.

“15년 동안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수면제를 먹고 잠깐 눈을 붙여도 눈앞에서 계속 울면서 호소하는 아들을 언제나 보았다.”

장궈칭의 집에 도착해 판결서를 내미는 국방부와 공군작전지휘부 간부들에게 어머니는 통곡했다. 마잉주 대만 총통은 장궈칭의 가족에게 ‘사법 개혁을 통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며 공식적인 사과문을 내밀었다. 법률 전문가들조차도 당시 군이 사건을 서둘러 해결하는 과정에서 장궈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면서 강한 비판을 했다.
 
2006년부터 사형제도 유예기간(모라토리엄)을 실시했던 대만은 사형을 4년 동안 집행하지 않았다가, 지난 2010년부터 사형 제도를 다시 부활시켜서 오늘날까지 9명이나 사형을 집행시켰다. 주변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례를 조명하면서 5000일 동안이나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대한민국도 사형 제도를 법률적으로 폐지하도록 국제인권단체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강구하고 있다.

억울한 사형수의 유언

삼중 스님은 사형제도가 범죄억제에 가장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추측일 뿐이라며 이러한 이유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고 규범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외에도 사형수의 집행을 지켜보는 사형집행인과 사형집행 확인인 등 다른 구성원까지도 정신과 심리 면에서 악영향도 배제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젊은 시절에 교도관 직업을 했던 사람이 현장에서 겪은 심적 부담감을 삼중 스님에게 꺼내놓았다.

“사람이 먹고살자고 하는 직업 중에서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할 직업 중에 하나가 바로 교도 공무원입니다. 재수 없어서 혹시라도 사형집행인으로 척출되는 순간부터 밀려오는 스트레스는 집행 현장을 지켜보면서 극에 달하여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은 목구멍으로 밥알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억울한 사형수로 ‘오휘웅’이라는 이름 석 자는 법조계에서 밥을 먹는 사라들이라면 거의 다 기억할 것이다. 물론 사이나를 애인에게 구해주었다는 죄명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한춘도 사형수도 삼중 스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가장 억울한 죽음은 단연코 오휘웅 사형수를 꼽았다.
 
삼중 스님이 앞장서서 목숨을 살려낸 최재만 사형수는 그래도 좀도둑질을 한 죗값을 엄청나게 부풀려 살인강도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수로 둔갑시켰지만 아무런 범죄에 가담하지 않아도 사형수가 된 오휘웅은 바로 일반 우리네가 당할 수 있는 형상이었다.

27살 젊은 총각 오휘웅은 10살 위인 여인을 사귄 대가가 너무나도 엄청났다. 쌀가게를 하면서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는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둔 38살인 두씨 성을 가진 여인이 무지하게 저지른 범죄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렸다.

남편과 어린 두 자식의 일가족 시신을 두씨 여인이 경찰에 신고하면서부터 두씨 여인과 정을 통한 오휘웅은 용의선상에서 일선에 놓였다. 일가족을 몰살한 엽기적인 사건은 정말로 무지한 여자의 머리에서 튀어나왔다. 천진한 어린 두 자식까지 죽이면서 자신의 범죄를 유장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교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사귀다가 남편과 자식이 2명이나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난 후 절교를 선언한 오휘웅에게 여인은 매달렸다. 더욱이 오휘웅이 새로 사귀는 젊은 애인에 대한 불타는 질투는 10살이나 많은 부족한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한 사랑을 배신당한 두씨 여인을 반미치광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젊은 애인이 절교를 선언하게 만든 게 바로 남편과 어린 자식들이라는 미친 생각을 현실에서 삭제해 버리면서까지 젊은 오휘웅에게 빠져 있었다.

일가족을 살해한 동기에는 젊은 정부가 있었다는 쾌거를 경찰에서는 그냥 넘기지를 않았다. 1970~1980년대 경찰 고문은 무지한 여인만큼이나 가혹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강압적인 고문에 정상적인 사람까지도 거짓 자백을 받아낼 판인데 제정신이 아닌 여인에게서는 물론 거짓 자백은 손쉽게 받아냈을 게 뻔했다.
 
어린 두 자식까지 몰살한 끔찍한 범행을 여자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뭔가 일을 크게 벌여야만 어깨에 단 쇳조각이 하나라도 덧붙여지는지 모진 고문은 오휘웅까지도 돌입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오휘웅이 공범을 했다는 증거물이나 지문을 전혀 찾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강제수사로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그러니 오휘웅은 재판장에서 억울함에 난동을 피우는 몸 시위 밖에는 더 이상 억울함을 선처할 곳은 없었다. 이런 기가 막히는 상황에서 1심 재판하는 도중에 주범인 두씨 여인이 자살을 해버렸다. 무죄를 증명해 줄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사람이 사라져 버렸으니 꼼짝없이 1심에서 사형 판결의 방망이를 막을 수 없었다.
 
통사정을 교도관을 붙잡고서 해보았지만 이미 끝난 사건이었다. 어디에서나 통하지 않는 이 세상의 한풀이는 집행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까지 풀어냈다. 검사가 입회하에 집행장에 선 오휘웅 사형수는 교도관들을 향해서 인사를 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이곳까지 저를 위해 마무리해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촉촉한 눈시울로 답례를 하는 교도관들에 이어서 검사에게 뼈아픈 한 마디를 저 너머 바깥세상을 쳐다보면서 편안한 목소리로 남겼다.

“재판 수사는 똑똑히 하시오. 나같이 억울하게 당하는 재판은 때려치우시오. 이렇게 누명을 쓰여서 사형장으로 끌고 온 이 세상은 살려주어도 살고 싶지 않소. 마지막으로 내 목숨을 거둬가려고 한 사람들에게 신의 자비와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시절 새파랗게 질린 검사는 분명히 평생토록 오휘웅의 뼈아픈 말을 기억할 게 분명했다. 아들의 시신을 인수한 아버지는 ‘법이 아들이 죽게 만들었다.’면서 통곡하면서 평생 피눈물을 흘렸다. 집행하는 순간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던 사형수의 유언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 놓으면서 오판의 가능성은 열어 놓았다. 1979년 처형된 사형수 오휘웅 씨의 이야기는 책으로까지 출판돼 사회적 파장은 대단했다.

사형수의 족쇄에서 어렵사리 풀려난 최재만 무기수는 대구교도소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부처처럼 추앙을 받았다. 고양이들이 생선 냄새를 맡고서 달려들듯이 억울한 사연들은 최재만을 향해서 몰려들었다. 감옥에 앉아있는 최재만은 철이 없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의 힘든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참 억울한 사형수가 있으니 스님 아버지께서 좀 만나 주세요.”

어느 때는 불쌍한 재소자의 수술비가 없으니 삼중 스님에게 도와달라는 부탁도 서슴없이 건넸다. 참 철없이 별의 별 부탁을 부처처럼 전하는 최재만 무기수에게 정색을 할 수 없는 삼중 스님과 최재만의 아내는 발만 구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억울한 사연이 담긴 사형수의 만리장성 편지들은 일주일마다 자비사로 날라들어 왔다. ‘우선 삼중 스님이 감동을 해야 구명운동에 뛰어드니 편지를 잘 써야 한다.’는 남다른 최재만 무기수의 가르침이 있었던지 정말로 억울한 사연들이 속속 전달되었다.
 
편지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사형수를 만나보면서 삼중 스님은 구명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10생에 걸쳐 소로 태어나서 죄업을 씻고 싶다던 차순석 사형수와 비슷한 사연이었다. 집을 나간 부인을 찾으러 간 처갓집에서 몸싸움 끝에 방화로 숨진 장모의 죽음으로 사형수로 변한 사건이었다. 처가쪽 형제간들이 달려드니 가지고 간 석유통을 떨어뜨리면서 불이 붙었다는 진실은 사라져 버린 채 처가쪽 진술만으로 법정을 이끌었다.

동생인 육군중령이 삼중 스님을 찾아와서 동생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법무부 장관직을 그만두고서는 변호사 사무실 금방 차린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은 삼중 스님이 가져 온 서류 더미를 보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스님은 매번 억울하다고 하는데 사형수가 어떻게 억울하다고 그럽니까?”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이 장관시절에 최재만 사형수를 살려주었는데도 똑같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참으로 깨끗한 법조인마저도 사형수가 어떻게 억울하다고 하는지에 의구심을 가질 정도이니 대다수의 법조인들에게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억울한 사형수가 어디 있어요?’라는 생각은 일반인까지도 그리 생각했다.
 
삼중 스님은 새문한교회의 장로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손지열 전 대법관과 동석할 기회가 있었다. 대쪽 같은 판사로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에게 항소심에서 3년 실형을 선고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현직에서 물러나 김앤장 변호사로서 동석한 손지열 전 판사에게 삼중 스님은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똑같은 사건을 판사로서 보는 눈과 변호사로서 보는 눈은 다를 수 있나요?”

강직한 손지열 전 판사는 자신의 품성대로 법은 똑같은데 사건을 들여다보는 법에 대한 해석은 입장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생도 그러했다. 손바닥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앞뒤가 뒤바뀔 수 있는 인생살이도 똑같았다.

그러니 형벌을 내리는 사건은 어떤 시각에 따라 생명이 날아갈 경우도 종종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건희 회장의 장인, 즉 홍라희 여사와 홍석천의 아버지인 홍진기 회장도 이 대목에서 뼈아픈 진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함부로 형을 선고했다. 여기 들어와 보니 하루가 지옥이다. 사람 피말리는 곳인데 함부로 5년, 10년을 선고했다. 만약에 재판을 할 기회가 있다면 어지간하면 집행유예로 처벌해야지 법조문만 보면서 함부로 체형을 내리지 않겠다.”

삼성 고 이병철 회장과 친하게 지낸 고 홍진기 회장은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인재로 일제 시절부터 판사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법무부 차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지낸 후 4.19가 난 후 비교적 짧은 감옥생활을 한 전력에서 느낀 소감은 법조인들이 새롭게 조명해야 할 진실이었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중간에서 선고하는 입장에서 사형 선고를 내렸다.

구형을 요청하는 검사와는 달리 판사는 형량 최후 결정에서 판사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10년 살리기도 했다. ‘그들 입장으로 가봐야 한다.’는 기준 하에서 모든 사건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정의로운 법정을 상상했다. 억울한 사건은 더러 있고 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중간에서 귀를 기울이는 재판장을 그려보았다.

sungae.kim@hanmail.net

/논설위원. 수필가. 이화여대 국제사무학 학사, 서강대학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전 인덕대학 전임교수. 전 경인여자대학 전임교수. 저서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 (한국 금융연수원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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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11/08 [09:39]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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