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 시절 하루에 23명 사형집행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들 단 하루만에 23명이나 사라지게해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12/16 [14:49]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하루에 23명 사형집행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들 단 하루만에 23명이나 사라지게해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10/12/16 [14:49]
새해 첫날을 기대했던 23명의 사형수들은 3개월의 임기를 남긴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7년 12월30일, 집행장에서 사라졌다. 일 년에 두세 차례 집행하였던 이승 전송식에서는 많아보았자 열 손가락을 넘지 않은 붉은 수번들이 사형수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이때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사형수들을 단 하루 만에 23명이나 사라지게 했다. 마치 겨울방학 동안 줄곧 미뤄왔던 과제물을 개학을 앞둔 바로 전날 밤에 날치기하듯 해치워버린 형상이었다.

우리나라를 사형폐지 국가로 진입시킨 첫 출발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기 시절부터 시작됐다. 2번씩이나 사형 언도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죽음의 문턱에서 고뇌하면서 지탱했던 하루하루를 살아생전에 절대로 잊지 않았다. 이승에 대한 강한 집착에 매달렸던 경험자로서 단 한 건의 사형집행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역경과 고뇌의 경험자로서 사형집행을 단행하지 않았다. 12년째에 접어 들어가는 사형제도의 논란은, 법적으로야 구형할 수 있는 현행법은 존재할지라도 이미 사형폐지국가로 변모한 자락에 서 있다. 이러한 변천 과정을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숨을 죽이면서 지켜보았던 사형수는 그 현장을 글로 담아냈다. 한 사형수가 느끼고 보았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상상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에 휩싸여 있는 사형폐지에 대한 올바른 결단을 강조했다.

1995년 11월2일 아침, 꽁꽁 얼어붙은 전국교도소의 풍경은 느슨한 반복적인 일상과는 사뭇 달랐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토해내는 사형수들의 질긴 흐느낌들을 고스란히 감방 창틀에서 숨죽이면서 지켜보던 사형수는 다가올 호출의 순간을 기다렸다. 발자국 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처럼 끌려가는 한 명, 또다시 한 명, 몸서리치는 몸부림에서 빠져나오는 음산함에 사시나무 떨듯 소름은 치솟았다.

광주구치소 담장 안에서는 자애로운 하나님의 손길과 자비로운 부처님의 은전으로 새 생명을 받은 무기수가 당뇨병을 달고 살았다. 11년간 붉은 수번을 가슴에 매단 채 죽음의 문턱에서 토해내는 통곡을 잊지 않았다. 김진태 사형수는 예수님과 부처님이 악수하여 만든 작품으로 무기수로 감형을 받을 수 있었다. 선물을 주신 큰어른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더불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의 감형에 숨어 있는 공로자는 이희호 여사라는 소문이 뒤따랐다. 김진태 무기수는 삼중 스님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비친 ‘죽음과 바꾼 당뇨’라는 글을 보내왔다.

김진태의 글 “죽음과 바꾼 당뇨”

“다람쥐 쳇바퀴처럼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탈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갇힌 자들이다. 하지만 사소한 변화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이들이 있다. 라디오 방송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운동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불안에 떠는 이들, 그들은 바로 붉은 수번을 가슴에 단 사형수들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런 사형수들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좋아져 그런 일이 없지만 예전엔 신문이 자주 삭제되어 나오던 때가 있었다. 법무부 방침이나 집회시위 소식, 흉악범죄, 교도소 소식 등이 나오면 여지없이 그 부분이 오려지거나 먹칠이 되어 나오곤 했는데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그곳에 마음을 빼앗겼다.

4동 근무자의 구둣발 소리는 마치 저승사자의 발걸음 소리처럼 들리기에 꿈속에서도 구둣발 소리에 가위를 눌리곤 했다. 그런 마음을 잘 아는 배려 깊은 교도관은 최고수가 있는 방 가까이에서는 발소리를 죽이려 애쓰는데 오히려 그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더 무섭게 다가왔다. 돌아 앉아 성경을 보다가도, 기도를 하다가도 직원의 발자국 소리가 내 방 앞에 멈춰서면 등허리가 시큰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그래서 사형수는 하루에 열 번 이상 죽는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형수들은 모두 한두 가지의 병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 사형수가 된 뒤에 생긴 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그런 스트레스를 받으니 병이 안 생기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1995년 11월2일, 나는 벌써 며칠 전부터 긴장을 하고 있었다. 문민정부인 김영삼 대통령이 5공, 6공, 군사정권을 청산한다고 공언을 하였으며 11월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한다는 기사가 신문, 뉴스에서 며칠 전부터 떠들어 온 국민의 관심이 그 일에 쏠려 있기에 분명 그날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예전엔 여론 희석을 위해 기획 정치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어떤 부담 있는 일이 있을 땐 여론을 돌리거나 큰 일 밑에 슬쩍 끼워 처리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날은 첫 추위와 함께 흰 눈발이 슬쩍슬쩍 흩날리던 날이었다. 아침 점검을 하는데 직원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일반수들이야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내 눈엔 그것이 보였다. 보통은 직원이 나를 보면 “어떠냐? 잘 있느냐?” 하는 식의 일상적인 인사도 해주고, 하다못해 눈인사라도 해주었는데 그날은 긴장감 어린 눈빛이 다급했다.

사형수가 된 지 3년, 오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것은 순서가 없기에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일 년 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찬물로 샤워하는 버릇이 생겨, 그날도 좁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 후 믿는 형제들과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평소 같은면 아홉 시에 운동을 시작하는데 그날은 운동도 없고 뒤뜰을 청소하는 청소부들도 출역을 하지 않았다. 설마설마 하던 예상에 확신이 드니 우왕좌왕 마음이 급해졌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짐 정리를 해야 하나, 유서를 써야 하나, 일일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쓸 정신도 시간도 없고 그저 몸만 달 뿐이다. 한 방 사람들도 불안해하는 내 모습에 덩달아 긴장을 한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보던 성경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것밖에….

한 발 무덤에 넣은 사형수

‘하나님! 제 두려운 마음을 제하여주시고 담대하게 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니 작은 온기 같은 위안과 안정이 내 마음을 감쌌다. 한 발을 무덤에 넣고 있는 사형수는 늘 죽음을 준비하기에 죽음 앞에서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담대한 반면 후회와 미련 또한 많기에 생의 애착도 가장 강한 편이다.

아홉 시 반쯤 되었을 때 내가 있는 건너 4동인 3층에서 웅성웅성 소란이 일어 뒤창으로 내다보니 빨간 모자를 쓴 생활지도반 직원들이 몇 명 보였다. 방역작업을 나온 구청 직원들처럼 흰 장갑에 흰 마스크를 모두 꼈다.

하긴 해충이나 전염병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이 사형수이니 당연한 복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자세히 보니, 평소 알고 지내던 나와 동갑의 천주교 최고수가 방에서 나왔다. 수갑을 채우고 사람이 양쪽에서 팔짱을 낀다. 조금 멈칫하더니 이내 포기한 듯 순순히 끌려갔다. 같은 사형수의 입장에서 그 모습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다음은 내 차례겠지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째깍째깍, 내 목을 서서히 조르는 올가미 같은 시간이 20분 정도 흘러 또 그 4동이 웅성거렸다. 내다보니 세상을 한동안 떠들썩하게 했던 장위동사건의 주인공이 끌려 나갔다. 그는 나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또다시 20분쯤 후엔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지존파 한 명이 또 끌려나왔다.

3층에 있던 최고수 세 사람이 모두 떠났다. 행운인지는 몰라도 내가 있던 4층에는 지존파 한 명과 나, 둘이 있었는데 그가 결핵에 걸려 집행 있기 얼마 전 병동으로 옮기는 바람에 나 혼자 있게 된 것이다. 그간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며 씻을 수 없는 죗값을 달게 받겠다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담대히 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집행이 닥치니 지은 죄와 각오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초조한 시간 속에서도 점심 배식은 여지없이 떴다. 마지막 밥이구나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말을 잃고 납덩이 같은 침묵이 구치소 안을 짓눌렀다.

오후 두 시쯤 되어 사람 좋기로 소문난 관구주임님이 오셨다. 순간, 드디어 내 차례구나 싶었는데 ‘진태씨 이제 다 끝났습니다. 힘들었을 텐데 거기 좀 누워요’라고 한다. 귀가 멍해졌다. ‘누구누구 갔습니까?’ 한참 말이 없더니 ‘많이 갔습니다. 우리 관구에선 진태씨 혼자 남고 다 갔습니다’ 우리 관구에만 아홉 명이 있었는데 여덟 명이 갔다니 그것도 나만 빼고, 안도감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다섯 시간이 5일보다도 길었다.

그날 결국 전국 19명이 집행됐고 내가 있던 서울구치소에서 지존파 6명을 포함해 15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피해자의 입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 자신이 사형수였었기에 사형제도나 법 감정, 집행에 동원된 직원, 참관인, 가족, 체제들에 대해선 언급한다는 게 주제넘은 일인 것 같다. 다만 공포 속에서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하는 최고수들의 심적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도 10년간 사형수로 지내며 네 번의 집행을 보아왔는데 아마 고통을 잴 수 있는 척도기가 있다면 사망 선을 넘어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길로 나는 사흘을 꼼짝없이 앓아누웠다. 오한과 두통을 동반한 심한 몸살로 고생하다가 사흘 만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부터는 극심한 갈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을 마시고 돌아서면 곧바로 목이 말랐고, 물배는 터질 것 같은데 입은 바짝바짝 말랐으며 음료수나 과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너무 이상해 집행이 있은 지 닷새 만에 의무과를 찾아가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했더니 당뇨가 심하다고 했다.

그것도 수치가 500이 넘는 매우 심한 당뇨라고 했다. 정상이 120인데…. 분명 집행 전까지는 멀쩡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의무과장님이 말하길 갑자기 생기는 경우는 아주 드문데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인 듯하니 마음 잘 다스리고 약 먹고 음식 조절하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루아침에 파편처럼 박혀버린 불청객 당뇨, 막무가내로 점령해 놓고 낄낄대는 하이에나 웃음 같은 고질이 들어앉은 지 어느덧 15년, 이젠 아예 배 째라는 식이다.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목숨과 바꾼 당뇨이기에 이젠 내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달래고 있다. 오히려 내 몸을 장악하고 있는 그 고질이 지금은 내 마음과 신앙생활에 척도기가 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매사 자중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혈당이 잘 조절되고, 불평불만으로 마음이 흐트러지면 혈당 조절이 안 되기에 늘 의식하며 생활을 절제하고 있다.

열 번 백 번 죽어도 싼 이 죄인에 새 생명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 것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구명운동이 오히려 형장으로

감방에 울려 퍼지는 여자 사형수를 대신해서 함께 지냈던 여자 재소자들은 삼중 스님을 찾아 들었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치부를 드려놓는 채 다른 사람을 위해 나서기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한 명이 나타나서 여운이 가실 만하면 다른 여인네가 불쑥 나타나서는 감방 안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 억울한 여자는 살려야 되지 않겠어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는 여자는 통사정을 했다. 부도가 나는 바람에 몇 달 동안 같은 감방에서 지켜본 결과 억울한 사연이 분명하다면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이미 사형을 확정받은 사형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라곤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성화에 이끌러 삼중 스님은 서울구치소에서 여자 사형수를 만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쯤 보이는 순박한 여인네와 한 시간 정도를 이야기를 하면서 지켜보았다. 일 년에 서너 번이나 집행을 하던 시절이니 같은 불자로서 더불어 교화위원으로서 죽음을 마무리하는 편안한 마음에 대한 화제로 얘기를 이끌었다. 이때 여자 사형수가 끼어들었다.

“스님은 말을 잘 못하시네요. 난 곧 나갈 사람인데 왜 자꾸만 죽는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나요.”

삼중 스님은 능청맞게 말을 가로막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정신줄을 약간 놓은 상태인지 가름해봐야 했다.

“교화위원으로 최고수들에게는 떠날 준비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스님! 저는 안 죽어요!”

“안 죽다니요?”

“죄를 안 지었는데 내가 왜 죽어요. 사형 언도를 백 번 받아 봤자 죄를 짓지 않았는데 당연히 안 죽지요.”

정신이 나간 듯 외치는 통에 삼중 스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였다. 멀쩡한 사람을 사형수로 만든 판검사들이 마치 바보들인 양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하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서 목청을 높이는 여자 사형수에게 교화위원으로서 물어보아서는 안 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한 번 들어봅시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사연으로 들어왔는지요.”

“청산가리로 친정아버지와 오빠를 죽였다는데, 왜 내가 내 가족을 죽여요? 내가 죽였다니요! 난 청산가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피를 토하고 죽을 지경이에요.”

끔찍한 존속살인 죄명에 대법원에서도 사형을 확정받은 억울함을 앞뒤 구분 없이 계속 반복해서 떠들었다. 사실 감방에서는 24시간 한구석도 숨길 수 없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억울함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데는 억울함이 존재할 수 있었다.

삼중 스님은 서울구치소를 나오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다. 이미 대법원에서 사형으로 확정된 사건을 뒤집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여자 사형수의 남편이 부산 자비사까지 찾아왔다.

“저 때문에 아내가 사형수가 되었어요.”

자신이 사다 놓은 청산가리가 원인이 되어서 아내가 사형수가 되었다면서 순박한 남편은 많이도 울었다. 화장실 위 칸에 올려놓은 청산가리는 아내는 물론 집안사람들 모두 자신이 사다 놓은 줄 몰랐다면서 또 울었다. 중앙대학교를 다니다 중퇴를 한 아들도 아버지 옆에서 훌쩍거렸다. 삼중 스님이 나선다면 분명히 마누라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무작정 찾아와서는 눈물로 하소연했다.

“내가 사다 놓은 청산가리는 나밖에 모르는 판에 내 마누라가 쓸 이유가 없잖아요. 집에서 청산가리가 나오니깐 일자무식한 내 마누라에게 덮여 씌운 거예요. 고문을 하면서 윽박지르면서 진술서에 사인하라 하니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여자가 이름을 쓴 것뿐이에요. 우리같이 무식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한국 땅에서 살라는 말입니까요.”

아무도 만진 흔적이 없는 청산가리 병을 증거물로 제출했지만 법정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고 했다. 단지 경찰에서는 청산가리가 집에서 나왔다는 초점에서 큰 사건을 만들어 버렸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배경을 삼중 스님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담당 pd를 만나서 이야기했다.

발빠른 담당 pd는 1시간 특집극으로 tv를 통해서 전국에 내보냈다. 삼중 스님은 tv 프로를 비디오테이프로 복사해서 돌아다녔다. 우선 가장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배명인 전 법무장관을 찾아갔다.

언제나 삼중 스님의 일이라면 백방으로 도와주는 배 전 법무장관은 곧바로 부하 직원에게 비디오테이프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를 서울구치소에서 대전교도소로 이송해 버렸다. 이송작업은 오히려 집행장으로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꼴이었다. 1997년 12월30일, 23명이 한꺼번에 집행을 당했던 날, 그녀의 이름 석 자도 대전교도소의 집행 명단에 끼어 있었다. 만약에 조폭 사형수들이 많이 있는 서울구치소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분명 그녀는 살아남았을 것이었다. 주먹을 퍽퍽 치면서 울부짖었던 여자 사형수가 삼중 스님의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도움을 주려고 동동거렸던 발걸음들이 오히려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가슴은 찢어졌다.

sungae.kim@hanmail.net

김성애 : 브레이크뉴스 논설위원. 수필가. 이화여대 국제사무학 학사, 서강대학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전 인덕대학 전임교수. 전 경인여자대학 전임교수. 저서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 (한국 금융연수원 공저)가 있다.



 
광고
광고
박상중 스님의 잊지못할 사형수 이야기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