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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중 스님의 잊지못할 사형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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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야쿠자 2명살해 김희로 석방내막
 
김성애 논설위원

필자는 교도소 교화로 일생을 보내 온 삼중스님와의 인터뷰 횟수가 많아지면서 스님의 마음속을 조금씩 읽을 수 있었다. 스님은 자신의 인생을 ‘미친 중’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등을 떠밀지 않았는데 수십 년을 왜?
 
무엇 때문에 600명의 사형수와 연을 맺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쏟아내는 스님의 헛웃음에는 삶의 공허가 배어 있었다. 남들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도 가슴에 담지 못할 속앓이에는 자신의 간과 쓸개를 빼 던지며 늙은 중의 부족함이 늘 후회스럽다고 했다.
 
이 헛된 것들이 자신을 낮추게 하는 업보라며 ‘내가 7명의 사형수를 살려내는 일은 미친 중이여서 했지,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삼중스님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업보를 더 받들다가, 다음 생에는 다른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스님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허망함에 필자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본 백과사전 인물난에는 한국인 ‘안중근’과 ‘김희로’라는 단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한일관계에서 더 유명한(?) 인물은 ‘안중근’보다 ‘김희로’가 근세 들어 일본인의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1968년 일본열도에 조선이 한 명이 전쟁을 선포한 장본인이다. 스님은 텔레비전 생중계로 진행된 뉴스에서 ‘김희로’ 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했다.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일본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사건을 생중계 했어요. 뉴스에서 ‘김희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어요. 한국인 한사람이 일본 전 열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때는 1968년 2월 20일. 1960년대 말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가와네 온천에 있는 후지미야 여관에서 인질극을 벌인 김희로를 검거하기 위해 십여 대의 헬기와 특수부대가 동원된 큰 사건입니다. 김희로는 술집에서 야쿠자 두목 2명을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후 여관에서 인질로 잡고 일본에게 전쟁을 선포했어요. 이 산골짜기에서 인질극을 벌인 이유는 간단해요.
 
야쿠자 두목을 2명이나 죽였으니 산골짜기 속에서 죽기를 작정하고 달렸으나 허사였어요. 산골짜기 낭떠러지에서 죽을 기회를 놓친 셈이죠. 이런 상황에서 예라 죽을 목숨 말 한마디라도 해야겠다는 사나이 뚝심이 나왔던 거죠. 자신의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칭칭 동여맨 채 인질극을 벌렸어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사연은 화제가 되었어요.
 
‘나는 당신들을 절대 해치지 않겠다,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이 나를 도와 달라.’ 김희로는 인질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해를 구했다고 해요. 이 인질극 나흘 동안 tv나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 되었어요. 그는 경찰들의 차별을 고발했어요. 관행적으로 저지른 한국인에게 대한 차별에 대한 공식 사과를 경찰서장에게 당당히 요구했어요. tv를 통해 경찰서장의 사과를 받아냄으로서 일본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어요.”
 
제일교포 인종차별 고발
 
‘김희로’ 사건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세계는 일본에서의 제일교포에 대한 인종차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사건의 장본인, 김희로의 아픔이 한국인의 아픔이라는 동질감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삼엄한 인질상황에서 인질로 잡혀있던 한 청년의 에피소드는 감동을 주었다.
 
한 청년이 다음 날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믿고 김희로는 흔쾌히 인질범을 석방했다. 풀려난 청년은 시험을 치른 후, 다시 김희로의 인질이 되기 위해 여관으로 들어갔다는 사연이다. 서로 신뢰하는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 옛날 여관 주인이 아들과 함께 김희로를 찾아 한국에 온 일화도 아름답다. 우리네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김희로는 우리나라의 설음을 풀어주었어요.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 서로 이해가 상충되는 영웅이었어요. 인질극 4일 후 결국 검거되었죠. 체포되어 8년간의 재판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어요. 이 인질극에서 ‘김희로’라는 이름보다는 유난히 기억에 남은 것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훌륭한 이미지였어요. 인질극이 극에 달하자 일본경찰은 김희로 어머니로 하여금 그의 자수를 권하려 했어요. 어머니는 얼마나 슬프고 충격이 컸겠어요. 어머니는 우선 아들이 입을 한복 한 벌을 인질극 현장에 넣어주었어요.
 
자수를 권하고자 건네받은 마이크를 통하여 전 일본을 상대로 어머니는 또 한 번의 전쟁선포를 했어요. 이 장면 역시 생중계되었어요. ‘희로야, 한복을 잘 차려입은 채 너는 자결을 해라. 네가 일본인에게 잡혀 고문당하는 것을 이 어미는 눈뜨고 볼 수가 없구나.’ 참 대단한 어머니였죠. 어머니는 그런, 큰 어른이었어요.”

김희로의 아버지는 그가 3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넝마주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의붓아버지의 밑에서 김희로는 갖은 구박을 받았다. 그가 열세 살해 되던 해 가출을 했다. 일본에서 홀로 지낸 그의 젊은 시절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그의 나이 40살, 자신을 설음을 대변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재혼으로 큰아들이 가출을 했다는 죄책감에 싸여 평생을 울면서 살았다. 재혼 후 낳은 두서 명의 자식들은 좋은 환경에서 훌륭히 잘 키웠건만, 늙은 어머니는 언제나 불쌍하게 홀로 자란 김희로만을 자식으로 여기면서 평생을 그리워했다.

“일본에 방문하면 ‘김희로’ 어머니를 언젠가는 한 번 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어요.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생각이 내 가슴속에 있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지만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는 꼼짝을 못합니다.
 
어머니의 눈물에는 두 손을 들고 내 능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약속을 해버려요. 김희로 어머니의 눈물에 녹아서 한 약속으로 내 인생의 많은 희로애락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김희로’ 구명운동에 뛰어 들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할머니의 눈물이 그리 만들었어요. 1983년경 일본을 방문했는데 불현듯 서울에서 한 지인이 들려주었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 어른이 시즈오카에 있는 한 시립양로원에 계시다는 한마디를 전해 들었어요. 이 한마디 말에 끌려 아무 생각도 없이 신간센 기차로 시즈오카로 떠났어요. 젊은 시절에는 ‘하자’는 마음만 들면 그대로 실행하는 괴력으로 많은 일들을 했어요.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몇 생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지네요.
 
그냥 시즈오카 지명만을 들었을 뿐 양로원의 이름은 몰랐죠. 그냥 기차를 타고 가면 할머니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인연을 만들게 되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니와 저와는 전생에 좋은 인연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김희로 아버지 일찍 죽어
 
할머니는 기골이 장대한 여장부였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17살에 밀선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한국인과 결혼했으나, 김희로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재혼으로 아들 김희로가 가출하여 외롭게 객지에서 고생했다는 죄책감에 싸여 평생을 울면서 지냈다. 할머니에게는 오직 큰아들만이 자신의 자식으로 가슴에 품고 김희로를 그리워했다. 김희로 역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세상 어느 자식들보다 깊었다.
 
집을 가출한 어린 김희로는 기차 선로 길에 입과 귀를 번갈아 대면서 보고픈 어머니와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머니,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집으로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어머니 기다려줘요.’ 슬픈 모자간의 이별은 김희로에게는 씻지 못 할 고통을 주었고, 어머니에게 죄책감에 젖는 아픔으로 평생을 눈물로 지내게 했다.

“시즈오카 역에 도착해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어요. 시즈오카에는 수십 개의 양로원이 있다는 말에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양로원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김희로 어머니를 찾는 일은 어려웠어요. 여러 관공서의 도움을 받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시즈오카 역으로 되돌아오는데, 역 도로변에 있는 택시 한 대가 눈에 띠였어요. 어떤 기대도 없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택시 기사에게 김희로 어머니를 물어보았어요.
 
뜻 밖에도 택시 기사는 김희로, 동생들 집, 그리고 할머니가 있는 양로원을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누가 들으면 소설이라고 할 거예요. 물어 본 우리가 더 깜짝 놀랐어요. 택시 기사는 친절이 지나쳐서 요청하지 않은 김희로의 동생 집에 나와 통역관을 데리고 갔어요.
 
명치대학을 나온 동생은 시즈오카에서 큰 부자로 살고 있었어요. 김희로의 이야기에는 좀 언짢은 표정을 짓더라고요. 할머니를 만나러 온 김에 한 번 들렸다는 말에도, 마당 한 가운데에 손님을 세워 놓았어요. 이 가족사에 무언지 모르는 불편함을 감지하기에는 충분한 분위기였지요.”

삼중스님이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휠체어를 앉아 있던 할머니는 삼중스님을 보자마자 스님 앞에 딱 꼬꾸라졌다. 스님의 장삼자락과 발을 부여잡았다. 그리운 고향에서 온 스님에게 할머니는 몸과 마음을 맡기며 매달렸다. 너무 측은한 마음에 삼중스님은 할머니를 진정시키려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정말 딱한 모습이었어요. 젊었을 때는 칠 척 여장부였던 분이 이리 초라한 모습에 얼마나 측은하고 불쌍해 보였던지. 나를 보자마자 휠체어에서 탁 꼬꾸라지더니 내 장삼자락과 발에 매달려 울부짖었어요. ‘스님, 내 아들을 살려주세요. 내 아들을 한 번만이라도 끌어안게 해주세요.
 
내가 늘 면회를 갔었는데 이리 돼서 가지도 못합니다.’ 울부짖는 노인네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여러 사람들이 부축하며 진정시키려 해도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았어요. 얼마나 쌓이고 쌓였으면 처음 보는 낮선 중에게 이리 울부짖느냐는 측은함에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울면서도 ‘스님, 내 아들을 만나 보았나요?’는 몇 차례의 같은 질문에 ‘아!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내가 김희로를 한 번이라도 만나봐야겠구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 전혀 현실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약속을 할머니께 하고 말았어요. 김희로와 나와의 인연은 할머니가 맺게 해 주었어요.” <제2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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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6/30 [21:16]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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