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과 공범자 죄값치러 죽은자 명복 빌어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양동수 어머니의 절규[2탄]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6/16 [21:11]

자식과 공범자 죄값치러 죽은자 명복 빌어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양동수 어머니의 절규[2탄]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10/06/16 [21:11]
삼중스님은 이미 어머니에게 미쳤기 때문에 불 속으로 뛰어드는 심정으로 달려갔다. 그 시간 이 후 대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스님은 진정서에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잠 잘 때가 없는 삼중스님은 다시 야간열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이러는 날이 매일 반복되었다. 무엇이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계종 윤고암 종정스님에게 찾아갔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감동을 받은 종정스님은 조계사에 있는 전체 스님들의 서명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서명에 반대하였다.
 
“불교 신문 주간을 하던 분이 싱긋이 웃으면서 ‘스님, 난 도장이 없어 못 찍습니다. 다 찍어 보십시오.’하는 그 말이 맞는 얘기예요. 수만 개의 달걀로 바위에 던져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그 속뜻이 맞은 현실이었어요. 무식한 내 행동을 그대로 밀고 나가 2만 명의 서명을 받았어요. 그 시절 할머니가 돈 만원을 주더라고요.
 
요새 돈으로 한 십만 원 정도 되어요. ‘밤에 도시락이라도 사 잡수십시오. 스님.’하는 말에 고마운 마음이 전달되었어요. 만분의 일의 성공 확률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는다면 평생 어찌 빚을 갚을 수 있겠냐는 심정이 들었어요. 이 돈을 주시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얼굴이 노래진 할머니는 돈을 다시 집어넣었죠.(웃음) 할머니의 108배는 계속 기적을 낳았어요. 제가 김천에 있는 금릉군 계림사 주지로 발령을 받았어요. 그 발령이 어머니를 살리는 계기가 되었죠.”
 

▲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그 시절은 국회의원 선거철이었다. 김천시 국회의원이었던 백남억 공화당 당의장이 다시 선거에 도전하던 때였다. 어디를 가나 스님은 어머니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김천 직지사 스님들에게도 진정서를 들고 갔다.
 
그 시절 정권을 잡은 공화당 의장은 대단한 실세였다. 백남억 의원을 통해서 법무부 장관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청탁을 직지사 스님에게 부탁했다. 선거 시기에는 직지사의 힘은 대단했다. 백 의원은 이선중 법무부 장관과의 만남을 마련해 주었다. 백 의원과 이선중 장관은 김천 계룡중학교 선후배 간이었다.
 
“키가 자그마한 이선중 장관은 강직한 사람이었어요. ‘스님, 어디 사형수가 진정을 할 대상입니까?’하는 말에 나는 사형수 때문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뜨악해져서 다시 묻더군요. 나는 어머니 때문에 왔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진정서를 내는 것이라는 말에 그제야 말을 차분히 듣더라고요. 내가 이야기를 참 감동스럽게 쫘악 펼쳤어요.
 
장관도 어머니의 자결 대목에서는 얼굴이 노래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대통령께 보고를 하겠다는 대답을 주었어요. 집행을 유해해 달라, 어머니의 노환으로 이제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느냐는 이 대목에 넘어간 거죠. 장관 자신도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하는 효자였어요. 이야기 끝에 장관의 어머님이 계림사에 다니는 불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그 절의 주지로 있다는 말에 나를 깍듯이 모시는 거예요. 일이 풀리려니 이리 기적을 일으켜요. 이게 다 할머니의 정성으로 이루어졌어요.”
 
법창야화 소재 3개월 방영
 
이선중 장관의 고향은 계림사 아래에 있는 동네였다. 불심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난 장관은 스님을 현관문까지 배웅하며 환대해 주었다. 드디어 1978년 12월 27일, 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이 나왔다. 양동수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을 받았다. 모든 신문들은 특종기사로 뽑아냈다. 특히 중앙일보 1면에는 스님과 할머니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스님과 할머니는 서로 끌어안고 뒹굴었다. 비오는 날 교도소 앞 진흙탕 속 두 사람의 울음과 웃음은 범벅이 되었다. mbc 방송국 ‘법창야화’는 새해 1월부터 3개월간 방송을 내보냈다. ‘법창야화 ’사상 500만원 현상퀴즈를 내걸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 이선중 장관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 시절 이야기를 했어요. 이 장관은 자신이 올린 사면권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베푼 사람은 잊어버리고 베품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하는 법이죠. 참 좋으신 분이예요. 이 일로 나는 유명인사가 되었어요. 할머니의 승리가 곧 내 승리가 된 거죠. 이 시기에 매스컴을 제일 많이 탔어요. 할머니가 나에게 큰일을 할 수 있게 길을 터주었어요.
 
무기로 감형된 양동수는 1997년 가석방되어 출소했어요. 출소 3년 전 할머니는 노환으로 수를 다하셨죠. 양동수는 죄수 신분으로 나와 자신의 어머니 49제를 올렸어요. 이 때 도와주신 분은 대구교도소 오희창 소장이었어요. 죽은 뒤에도 할머니는 까치가 되어 자식을 돌보았어요. 오 소장은 양동수와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엮여졌어요.”

양동수의 어머니는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지경에서도 남은 생, 자식을 면회했다. 마지막 순간 남긴 이야기에서 아들에게 세 가지를 유언을 남겼다. ‘너는 나오거든 꼭 스님이 되어라. 네가 부처님 덕에 살았으니 장가가서 애 낳고 살면 안 된다. 너로 인해 죽은 사람에게 도리가 아니다. 한 세상 태어나지 않는 폭으로 좋은 일하고 살아라.’ 죽은 뒤 어머니는 까치가 되었다. 양동수의 49제 특별 가석방, 감방 안에서의 불미스런 죄로 대구교도소로 쫓겨났던 일, 그리고 1997년 가석방을 서면으로 확정하기까지 계속해서 깍깍~~울었다.
 
“가만히 생각해도 참 희한한 인연이 있어요. 양동수와 오희창 소장은 특별한 인연이었어요. 어렵고 힘든 일들을 있으면 오 소장이 나타나서 처리해 주었어요. ‘법창야화’를 쓰는 작가가 일을 만들었던 때도 그랬어요. 사형수 얼굴을 보고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보지 않고서는 쓰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렸어요. 일반인들, 특히 언론인들은 법무부장관의 허락을 얻어야만 면회가 가능해요.
 
그 때 젊었으니 일을 밀어 붙였어요. 무조건 교도소로 쳐들어가서 소장과 담판을 했어요. 방송을 해야만 양동수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앞뒤 잴 것 없이 소장을 만났어요. 스님만 면회가 가능하고 다른 촬영 팀들은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그런 통고에도 초소를 통과하려니 당연히 세 사람은 잡았어요. 내가 직원에게 가서 거짓말을 했어요. ‘저 세 사람은 청년회 불교신자들이다. 면회를 같이 하고 싶다.’하는 말에 들여보내지 말라는 소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요.
 
오희창은 그 때 보안과장을 지냈어요. 오과장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죠. 내가 할머니의 절절한 이야기를 오 과장에게 했어요. 다 듣고 나더니, 직원을 불렀어요. 스님과 양동수의 면회를 허락하되, 저 세 사람은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된다는 엉뚱한 논리에 깜짝 놀랐어요. 보안과장이 mbc 방송과 면담 중에 스님이 사형수를 그 옆 자리에서 교화하는데 일이 터지겠냐는 대단한 뱃심에 사뭇 감탄을 했죠. 잘못 되면 자신의 목은 날아가는 삼엄한 유신체제였어요.”
 
유언대로 스님이 된 사형수
 
‘법창야화’의 대단한 인기는 양동수, 어머니, 삼중스님을 유명한 인사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49제 때도 죄수 신분인 양동수를 하루 동안 가석방해 준 이가 바로 오희창 소장이었다. 그리고 마산교도소에 있던 무기수 양동수가 무슨 일에 연루되었는지 대구교도소로 이관되었다. 이관된 무기수는 감방 내에서 방장이라는 모범수가 되지 못한다. 모범수가 되어야만 가석방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양동수는 울면서 삼중스님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까치는 오희창 소장의 가슴에 들어와 양동수의 가석방을 위한 품신을 하도록 마음을 열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나는 나를 팔아먹는 일들을 많이 했어요. 비난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죠. 그러나 내가 죽고 난 후 그 진실은 밝혀지리라 여깁니다. 할머니의 사랑이 모체가 되어 지금의 제가 서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가석방된 양동수는 저를 간혹 찾아옵니다. 며칠 전에도 만났어요. 그는 할머니의 유언대로 스님이 되었어요. ‘삼상’이라는 법명으로 설법을 하는 서예가가 되었어요. 어머니 때문에 심성은 더 착해졌어요. 그 할머니는 내가 이 땅에 산 보람을 남기고 85세 수를 다하고 갔죠. 참 고마운 할머니입니다. 나를 경제적으로 살려주었어요. 이 할머니, 어머니는 숭고한 사랑을 꽃 피운 이야기입니다.”
 
사형수 600명 만난 스님
 
양동수의 어머니로 인해 유명인사가 된 삼중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더 알렸다.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자신의 왼 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삼중스님은 자신의 일을 말한다. 분명 그 이유가 삼중스님에게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숨은 이유를 스님과의 여러 차례 만남에서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는 조직적으로 교도소의 교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지원이라면 경제적, 종교적,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의 정신일 것이다. 이 중 하나만 없어도 교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삼중스님은 홀로 사형수들을 600명을 만났다. 그냥 맨손으로 만날 수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가면서 정신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이 면에서 분명 이유를 밝힌다. 삼중스님은 강연 후 사례금을 받는다. 받은 강연비와 주변 지인들의 후원비로 교도소의 교화는 진행된다. 이러한 창조적인 경제관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주변에게 알려야만 지원금을 충당 받을 수 있다.
 
삼중스님에게는 다른 철학이 있다. 스님의 절에서 나온 돈은 절대 쓰지 않는다. 부처님 오시는 날에 연등을 팔지 않는다. 단지 스님이 강연과 후원을 받은 지원금으로 교도소의 교화를 한다. 교도소 교화하는 길에는 삼중스님을 개척자, 선구자로 앞장세우고 싶다. 선구자의 입장에서 삼중스님은 대단히 위대하다. 대부분의 많은 종교인들은 삼중스님을 개척자로 칭송한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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