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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중 스님의 잊지못할 사형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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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형집행되면 소로 태어나고 싶어요”
박삼중 스님의 증언 '사형수 스토리'
 
김성애 논설위원

불교의 윤회가 사실이라면, 그의 소원에 따라 지금은 소가 되어 있을 사형수 차순석의 이야기. 삼중스님은 말한다. 촌중에서도 제일 오지 촌에서 새마을 지도자를 지냈던 아주 순박한 촌놈이 사형수로 변했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그의 참회하는 모습에서 살아 있는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 스님이 경상남도 의령의  지명도 잘 알려지지 않는 어느 산골 속에 묻힌 그의 집을 찾아 가 본 후, 그의 아픔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한순간의 잘못이 살아생전, 아니 죽음 이후까지 나락으로 빠뜨린, 눈물겨운 사형수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1989년 삼중스님은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차순석 사형수를 만났다. 죄수복을 입은 그의 모습에서는 아직도 순박한 촌내가 물씬 풍기었다고 한다.

“차순석은 불교신자였어요. 나와의 첫 만남에서 ‘제가 집행이 되면 소가 되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죽어서 몸으로 보시하고 싶습니다. 다음 생뿐만 아니라 10생까지 소로 태어나서 죄업을 참회하고 싶습니다.’ 아주 순박한 참회의 말에 감동했어요. 이 한마디의 말에 반하여 그를 자주 만나게 되었죠. 그를 옆에서 지켜보면 볼수록 너무나 착한 모습에 진한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의 구명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995년도에 집행이 됐어요. 그의 마지막 유언 역시 처음과 같은 말을 했죠. ‘다음 생에는 소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이 교도소에서 스님으로 불리었지만 이생에서의 저는 스님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10생 동안 소로 태어나 열심히 일한 후, 몸뚱이도 맛있는 고기로 보시하고 싶습니다. 10생을 참회한 후, 그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집행된 이후 지금 이 시간은, 그의 소원대로 소로 태어나서 일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도 10생이 지난 몇 백 년 뒤쯤, 그는 스님이 되어 많은 은덕을 쌓을 겁니다.”
 
비극의 씨앗 아내의 가출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차순석 사건의 배경에는 그의 아내와 처남이 범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농촌을 지키는 모범적인 촌놈이 사고를 한 번 치면 크게 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평한다.
“가정사의 비극이 범죄를 만들었어요. 차순석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데. 촌놈은 농촌에서 살고자 했고, 아내는 도시에 나가서 살고자 했어요. 그는 노부모에게 효도하면서 농촌에서 살고 싶어 했어요. 나도 그의 오지 집을 서너 번 찾아갔는데, 농촌 생활은 참 참혹했어요. 밖으로 도는 외향적인 아내는 도시에 살고 있는 친정 오라버니에게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소상히 말했겠죠. 아내는 농촌을 떠나고 싶어 더욱 오라버니에게 매달렸을 거예요. 그러니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에서 오라버니는 서울에서 살 방법을 모색했겠죠. 기술이 없는 차순석은 노동일, 아내는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서울에서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했대요. 이러니 가정불화는 끊임이 없으니, 드디어 아내는 가출을 했어요. 그 때 막내애가 돌이 아직 지나지 않은 시기라고 해요. 젖먹이를 떼어 놓고 아내가 가출을 하자 그의 눈은 뒤집어졌겠죠. 우유를 살 형편도 되지 않지만, 우유를 파는 가게조차도 없는 촌 동네예요. 아이 둘이 빽빽 울어대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아내의 친정 부모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빌기도 여러 차례, 이 촌놈은 제정신이 아니었겠죠. ‘우리 가정을 파괴했다, 그 주범은 처남이다, 처남이 바람을 넣어 아내를 가출시켰다, 처남도 애 가진 애비 아니냐? 내 핏덩이에게 이리 고통을 주니 너도 당해야 한다.’ 순박하다 못해 무지한 그는 앞뒤 생각도 없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어요. 처남의 아이 둘을 유괴하여 살해한 끔직한 범행을 저질렀어요.”

삼중스님은 차순석이 자신의 가정사로 아무 잘못도 없는 조카들을 유괴하여 살인한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잔혹한 범죄라고 했다. 그러나 유괴범들은 처음부터 애들을 죽일 생각으로 유괴하지 않는다고 한다. 차순석 역시 자신의 애간장이 탄 만큼, 처남도 느껴봐야 한다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괴한 애들은 당연히 울 테니 순간 당황한 초범들은 대부분 어린이들을 죽인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사건이나 처음의 잘못된 시각이 큰 비극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차순석은 어린이 유괴 살인죄로 사형수가 되었다.

“그의 구명운동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두 곳에서 진행했어요. 한 쪽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의 장모가 도움을 주었어요. 그 당시 그 분은 대구에서는 아주 불심이 깊은 할머니였어요. 그 분은 불교행사 때 교도소에서 만난 차순석의 모습에 감동하여 그를 돕기 시작했다고 해요. 차순석의 편지를 자신의 딸에게 전달했다고 해요. 그러니 차순석은 그 할머니에게 큰 희망을 가졌어요. 그러나 대통령에게 탄원한다고 해서 구명이 되는 것은 아녜요. 저 또한 나름대로 구명운동을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사형수가 내놓은 100만원
 
삼중스님은 그를 면회할 때 마다 꼭 한가지씩은 배우고 온다고 했다. 그의 순박한 마음은 교도소에 있는 교도관, 동료 재소자 모두를 감동시켰다고 한다.

“나를 만나면 꼭 삼배 절을 해요. 그에게서 한 가지라도 꼭 배우고 와요. 교도소 내에서 살아있는 부처, 스님으로 통했어요. 교도관들도 감동해요. 그 순박한 마음 그대로 생활하니 그 자체가 부처였어요. 얼마나 착했는지 그는 교도소에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사형수는 교도소에서 작업을 하지 못해요. 그러니 작업수당은 당연히 없죠. 교도소에서는 치약, 칫솔, 내복, 비누 등을 본인 사비로 사야 되요. 최저 생필품을 구입하도록 영치금을 넣어 줄 주변 사람도 없는 촌놈이 돈이 많이 생겼어요. 워낙 착하다 보니 경제사범으로 들어 온 동료들이 가족에게 부탁하여 그의 영치금을 넣어 주었던 거예요. 그 돈으로 불쌍한 죄수들을 도와요. 대부분 죄수의 99%는 아주 가난하고 불쌍해요. 비행 청소년, 장애인, 생필품을 살 수 없는 재소자들에게 그 돈을 쓰는 놈이었어요. 그러니 교도소의 성인이라고 불리었죠. 교도소에서 자신이 제일 힘든 사형수이면서 이리 도와주니 더 큰 감동을 주게 되죠.”

삼중스님은 차순석이 준 선물 중에 가장 잊어지지 않는 선물이 있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일본에 있는 김일 선수의 근황을 우연하게 듣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 선수가 비행기 표 값이 없어서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의 한 서민병원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프로 레슬러 김일은 어릴 적에 우리들의 영웅이었죠. 죽어가는 김일 선수에게 비행기 표 값을 들고 제가 일본으로 갔어요. 임종 직전인 김일 선수는 초면인 나를 보자마자 통곡을 하더군요. 이 내용의 기사가 사회면의 톱으로 크게 났어요. 그 기사를 차순석이 교도소에서 봤나 봐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내용이었어요. 면회할 때 차순석은 나에게 120만원을 주겠다고 해요. 김일 선수에게 100만원, 산골 고아들에게 20만원을 건네 달라는 거예요. 그 당시 사형수의 돈 100만원은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에요. 감옥에서 수백억과 맞먹는 돈이죠. 지 새끼에게는 주지 않고 그 산골 고아들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 20만원이나 주고, 참 착한 사람이었어요. 너무나 당황스러워 내가 말했어요. ‘알았다. 내가 다 네가 말한 대로 할 테니, 그 돈은 시골 노모에게 드려라’ 그리 말해도 꼭 자기의 뜻대로 해달라고 간청을 했어요. 내가 면회를 오는 날에 맞추어 이미 시골 할매를 불러 놓았더라고요.”
 
사형수의 돈 받고 펑펑 운 김일
 
형법에서 재소자의 통장에 있는 돈은 가족만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찾기 위해 빼빼 마른 촌 할머니는 산골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그의 통장에서 찾은 돈 보따리를 가슴에 꼭 안고, 촌 할머니는 스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 할매는 전형적인 초라한 촌 할매였어요. 아들이 부탁했다면서 돈 보따리를 나에게 털썩 건네주었어요. ‘할머니, 이 돈은 가져가세요. 애들을 위해서 두었다 쓰세요’ 하니 한사코 아들이 알면 큰일 난다고 손사래를 쳐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 하다가 내가 우선 돈을 받았어요. ‘내가 아들의 돈을 받았다. 그러니 이 돈은 내 돈이다. 내 돈을 애들에게 주고 싶다. 아들에게는 말하지 마라’ 이리 강하게 말하니 그 할매는 눈물을 흘리면서 돈 보따리를 받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그리 할매에게 사형수 아들의 돈을 다시 건네 준 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당시 내가 삼성전자의 특강을 하다가 김일 선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했어요. 삼성 전자의 이상배 이사가 선뜻 천만 원을 기부하더라고요. 차순석의 백만 원이 삼성전자의 천만 원보다 몇 백배 큰돈이에요. 그 만큼 그의 마음은 참 아름다웠어요.”

김일 선수는 삼성전자에서 기부한 돈도 고맙지만, 차순석의 돈을 받아 들고는 그 큰 덩치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전혀 알지도 못한 사형수가 준 돈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김일 선수의 사진이 일본 마이니치 사회면 기사에 크게 났다고 한다. 삼중스님이 준비한 차순석의 돈은 그의 아름다운 마음과 같이 아름답게 쓰였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 온 김일은 차순석을 만나고 싶어 했어요. 그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고 있었죠. 김일은 사형수의 돈을 갚아야만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어요. 그래서 궁리 끝에 부산에서 김일 선수를 위한 자선 전시회를 열었어요. 김일 선수의 사정을 아는 지인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죠. 산골의 할머니와 아이들을 부산 전시회에 초청했어요. 전시회의 수익금을 차순석의 아이들에게 주었어요. 중학생 딸과 초등생 아들은 철이 들었던지 울더라고요. 김일은 두 아이의 뺨에 얼굴을 부비면서 함께 우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었어요. 김일은 아마 몇 배로 차순석의 빚(?)을 갚았을 거예요.”
 
일본인 가끼루마 스님도 면회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삼중스님은 이리 나쁜 환경에 있는 사형수라도 좋은 심성으로 주변을 따뜻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비록 사형수의 아버지는 죽었지만, 철이 든 두 자식은 아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감동스런 광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유명한 고승도 차순석의 순박한 마음에 반하여 그의 구명운동을 함께 했다고 한다.

“일본인 가끼루마 스님은 일한불교 복지협회 회장을 지내신 훌륭한 스님이었어요. 제가 하고 있는 ‘귀무덤 코무덤’ 일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셨죠. 가끼루마 스님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인연이 있었던지 차순석을 면회했어요. 일반적으로 외국인은 교도소 내에서는 교화를 하지 못해요. 물론 법무부 장관의 허가를 얻었을 때는 가능하죠. 가끼루마 스님에게 차순석 이야기를 했더니, 한 번 만나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대구 교도소에 함께 갔어요. 우선 교도소 옆에 있는 사형수 묘지를 보여주었죠. 무연고 사형수와 재소자들, 연고가 있어도 가족이 시신을 넘겨받지 않는 재소자들, 이 땅에 가장 비극적인 장소이죠. 일본 스님과 제가 함께 염불을 올린 후 교도소의 면회를 시도했어요. 이상하게도 초소와 교무관 직원이 아무런 걸림도 없이 그냥 통과시켜 주었어요. 나는 교도소 정문에서 되돌아 올 것을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일본 스님이 그를 면회하게 되었어요. 일본 스님과 차순석은 처음부터 서로 붙들고 울더라고요. 참 의아하게 여겼어요. 처음으로 보는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아마도 무슨 인연이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5~6년 전부터 차순석은 가끼루마 스님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다는 소원을 부처님에게 빌었다고 해요. 나는 처음 듣는 말이었어요. 가끼루마 스님은 한국을 도와 좋은 일들을 많이 하신 분이셨죠. 그는 일본의 훌륭한 스님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어서 부처님에게 계속 빌었다고 해요. 가끼루마 스님은 차순석이 삼배 절하는 모습만으로도 감동하여 그리 붙들고 울었어요. 그 순박한 그의 모습은 그대로 부처였어요. 때가 전혀 묻지 않는 맑은 심성이 눈빛 가득히 담은 그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1995년에 사형 집행되다
 
가까루마 스님은 차순석의 구명운동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형수를 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어린이 유괴살인은 어떠한 과정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이미 사형의 틀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한다.

“1995년에 그의 집행은 이루어졌어요. 그의 소원대로 소로 태어나서 이생에서 참회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도 몇 백 년 뒤까지 그의 10생은 소가 되어 참회할 것입니다. 10생이 끝난 다음 생은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어요. 아마도 유명한 스님으로 많은 은덕을 쌓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의 집행을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했으나, 이곳에서 10년~20년을 더 산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오래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 그는 충분히 참회하여 빚을 갚고 떠났습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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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01 [17:10]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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