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저는 결코 사람 죽이지 않았습니다”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최재만 구명 스토리 <제l탄>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3/21 [22:37]

“스님, 저는 결코 사람 죽이지 않았습니다”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최재만 구명 스토리 <제l탄>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10/03/21 [22:37]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삼중스님은 한 명의 사형수를 중심으로 좋은 인연들에 의해 맺은 열매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3년 3월,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삼중스님과 사형수 최재만과의 인연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억울한 누명으로 사형수가 된 최재만은 17년간의 감옥살이를 끝냈다. 지금은 사회인으로 복귀,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고 있다. 삼중스님은 최재만 사형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죽음을 넘나드는 옥중 생활에서 훌륭한 4분의 양아버지를 선물로 받았다. 구상 시인(고인), 배명인 전 법무부 장관, 조계종 서옹 정종스님, 그리고 삼중스님, 큰 인물 4인이 그의 양아버지이다. 이들은 사형수 최재만의 억울함에 울고, 가석방의 기쁨으로 함께 눈물을 흘린 이들이다.

최재만의 17년간 감옥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한 중심에는 당연히 그의 아내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가꾼 위대한 승리라며 삼중스님은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녀가 홀로 지켜낸 가정으로 최재만은 17년 만에 돌아왔다.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그의 염주에 새긴 '귀필가(집으로 반드시 돌아간다)'의 염원은 그녀의 착한 마음과 손에서 완성됐다. 삼중스님은 사형수의 아내로 살아왔던 그녀의 삶은 부처처럼 존경스러웠다고 회고했다.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삼중스님은 사형수로 옮아 맨 최재만의 사건에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형수 최재만에게 일어났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최재만과의 첫 만남에서 그의 여유로움에 반했다고 한다. 최재만과 한 번의 인연이 이생에서의 좋은 인연으로 변하였다며 눈을 지그시 감으며 회상했다.

“서울구치소 교화실에서 처음으로 만난 최재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는 불자였어요. 첫 만남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염주를 굴리는 편안한 모습이 꼭 부처님 모습과 비슷해 보였어요. 나보다 더 오래 수행한 수도승처럼 여유롭게 염주를 편하게 굴렸어요. 이런 편안한 모습에 감동되어 최재만 손에 쥐어있는 염주에 시선이 갔어요.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얼굴은 나보다 더 편안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어요. 엉뚱하게도 불자인 내가 그의 염주가 탐이 났어요. 그래서 '우리 염주 서로 바꾸세' 하니 '죄송합니다. 안됩니다. 스님'하는 거예요. 아니 내가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었어요. 불자인 내가 평생 아끼던 염주와 바꾸자고 했는데 거절당하는 게 자존심이 약간 상하면서도, ‘허참! 이 사람 봐라.’하고 뇌리에 뭔가가 스쳤어요. 최재만은 내 안색이 좀 변해 보였던지 '스님, 제가 이 염주 알에 금강경을 새겼습니다. 부처님 말씀만을 새겼다면 제가 스님께 드려야죠. 그러나 염주 한 알에 내 한을 새겼습니다. 이런 추한 염주를 어떻게 스님께 드리겠습니?! ??' 그래서 염주 한 알에 새겨진 글자를 자세히 봤어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귀필가' ‘집으로 반드시 돌아간다’ 뜻이죠. 그의 처지로는 도저히 해당이 되지 않는 글귀가 염주에 새겨져 있었어요. 나는 최재만과의 만남은 단지 같은 불자로서 대화하려고 찾아 간 뿐이었어요. 내 뇌리에 남아있는 무언가에 끌려서 '귀필가'의 연유를 물었어요. '스님,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 감옥에서 저는 죽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노모와 아내가 있고, 나만을 목 빼며 기다리는 자식 2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재만에 대한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어요.”
 
1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
 
삼중스님은 말한다. 이 사건은 한 경찰관의 시나리오에 의해 살인 누명을 덮어씌운 사건이라고 했다. 4명의 양아버지들은 1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아들을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 다하여 그 아들의 염원인 ‘귀필가’를 이루어 주었다고 한다.

"1981년 2월, 경기도 시흥 의양에 있는 농협 청계분소에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복면을 쓴 3인조 강도들은 야간 당직자인 농협의 분소장을 칼로 살해하고 돈을 훔쳐 달아났다. 사건이 일어난 같은 날, 회사의 해고로 함께 최재만을 포함한 5명은 농협 청계분소 가까운 장소에서 화투를 쳤다. 판돈이 적은 돈내기 화투는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5명 모두 뭐에 쓰였던지 함께 좀도둑질을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추적하던 중, 5명 중 한명이 체포됐다. 체포된 한명으로 줄줄이 공범들 4명이 붙잡혔다. 다섯 명 모두 가정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5명 중 2명은 어린애 우유 값이 떨어지자 처음으로 도둑질에 가담했다.

경찰은 청계분소 살인강도의 진범을 추적하였으나,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자 경찰은 상부로부터 계속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담당 경찰관에 의해 조작된 살인강도 사건의 시나리오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진범의 체포가 불투명해지자 담당 경찰관은 같은 날 도둑질한 범인들에게 협의를 뒤집어 씌었다. 5명 중에서 초범 2명을 뺀 3명에게 강도살인죄로 묶어 나갔다. 그 시절은 계엄시절이었다. 밤 12시가 넘어가자 여관에 3명을 잡아 놓고 '너희들은 살인강도 공범이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죽어줘야겠다.'하며 까놓고 사건을 만들어갔다. 그렇다. 처음부터 아닌 줄 알면서 만들어갔다.

잡범을 살인 강도죄로 엮는 과정에는 그저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밖에 없다. 그래야만 지문이 찍힌 자백서가 경찰 담당관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경찰은 진범이 하천에 버린 칼을 찾아내어 최재만에게 내밀었다. '이 칼을 손으로 잡아라. 네가 범행에 쓴 것이다. 청계분소 개천 상류에 버릴 것이다. 그 장소를 기억해라.' 최재만의 지문이 있는 칼은 담당 경찰관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에 다시 내다 버려졌다. 담당 경찰관은 자신의 시나리오에 맞추어 현장에서 다시 칼을 찾아냈다. 검찰 기록에는 최재만의 지문이 찍힌 칼을 사건현장 근처에서 찾았다는 기록이 소상하게 적혀있었다. 최재만을 살인죄로 옮아 매려는 무거운 철판들은 10겹이나 덮고 또 덮었다. 어느 누구라도 뒤집을 수 없는 사건으로 만들어 재판을 끝냈다. 결국 사형 집행장으로 최재만을 몰아넣어 버렸다."

삼중스님은 젊은 시절에는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스님은 최재만의 사건에는 뭔가가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형수의 이야기와 자신의 직감만으로 100%의 확신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공범 2명을 만나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삼중스님의 젊은 시절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당장 실천하는 성미 급한 저력(?)이 있었다고 한다. 공범 1명이 수감되어 있는 김천 소년교도소를 무작정 찾아갔다고 한다.

"19살인 공범은 무기형을 선고 받았어요. 아마 19살 소년수가 아니라면 사형이 구형되었을 거예요. 그 공범은 면회실에 성호를 그으면서 들어 왔어요. '스님께서 천주교 신자인 저를 왜 만나러 오셨습니까?' 하면서도 자신을 면회하러 온 나를 고마워했어요. 지인의 부탁으로 왔다며 거짓말을 했죠. 최재만 사건을 확인하러 온 내색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야 자연스럽게 공범의 진실한 마음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소년의 첫마디에서는 자신에게 구형된 무기형벌에 승복한다고 했어요. 이 ‘승복’이라는 단어에 '그럼 그렇지, 최재만이 범인이 맞구나!'하는 생각이 번득 스쳤어요. 다시 한 번 확인할 욕심에 무슨 죄로 무기형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빵과 돈을 훔쳤습니다.' 공범은 교도소에서 천주님을 믿어보니, 빵 몇 조각, 돈 몇 푼이라도 훔친 것도 큰 죄라면서 무기형도 승복한다는 의미였어요. 너의 범죄기록에는 살인강도죄라고 적혀 있던데 어찌 된 거냐? 물어보니 '아닙니다. 스님, 5명이 빵과 돈을 훔쳤습니다.‘ 5명 중에서 3명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고 했어요. 덧붙여?! ? 자기는 고아라서 괜찮은데, 최재만 형은 사형수가 되어서 불쌍하다고 했어요. 형은 어머님이 살아 계시고, 애들도 2명이나 있는데 형네 가족들이 불쌍하다고 했어요. 최재만이 나에게 말한 내용 그대로, 19살 소년범의 입에서 사건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공범을 특별접견하다
 
삼중스님은 더 욕심을 부렸다고 한다. 며칠 후 다른 공범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사전 예약도 없이 찾아갔다고 한다.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그래 마지막 한 놈 더 만나보자. 38살 무기형을 구형받은 공범은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죠. 무작정 가서 특별접견을 요청했어요. 그랬더니 교도소 과장이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어요. 단 몇 분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다시 요청하자 그때서야 '나갔는데요.'하는 대답을 했어요. 무기형으로 구형 받는지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강하게 따졌어요. 그랬더니 그제야 사실을 말했어요. '스님,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되는데, 스님을 믿고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죽었습니다. 형 집행정지를 내리려는 순간에 지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왕 나온 말이라며 창자에 구멍이 뚫려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어요. 청주교도소를 다녀 온 다음, 면회실에서 만난 최재만이 나에게 그 곳에 있는 친구의 건강을 물어 보았어요. 내가 공범을 만나러 간 것을 최재만은 알고 있었죠.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랬더니 최재만이 ‘그 친구는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도 그랬지만 아마 창자가 터질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을가?. 처음에 스님을 뵙고 저의 이야기를 할 때도 저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다시 진상 조사를 하는 경우 저에게 다가 올 고문을 다시 당하느니 차라리 사형수로 편히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최재만의 말대로 그 당시 고문은 대단한 때였어요.”

삼중스님은 두 명의 공범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미 100%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더불어 처참한 고문으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또 다른 범죄를 목격함으로써 더욱 최재만 사건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삼중스님은 최재만 누나가 들려 준 이야기에서도 최재만의 억울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님을 만난 그녀는 범행 하루 전 날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너무도 억울하다 못해 펄펄 뛰었다고 한다.

"청계분소 살인사건 전날, 최재만은 누나와 크게 싸웠다고 해요. 싸우던 중, 누나가 병으로 내리 친 게 잘못되어 최재만의 눈에 맞았다고 해요. 그래서 사건 하루 전부터 최재만은 눈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고 해요. 이런 내용을 근거로 범행 당일 현장에 있었던 농협 여직원 3명의 증언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범인들은 범행을 하기 전에 꼭 한 두 번은 현장에 가서 범행의 동선을 확인하는 습성이 있어요. 은행 일과를 마친 밤에 일어난 범행 사건이니, 사전답사는 분명히 이루어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최재만이 사건 전 날 붕대를 감은 채, 농협의 업무시간에 들어 왔다고 가정하면 당장 눈에 띄었을 테죠. 그 반대로 붕대를 풀어 버린 채, 농협에 들어왔다고 가정해도 분명 눈에 난 상처는 띄었을 겁니다. 변호사측에서 제출 한 여러 증거들은 검찰에서는 무시해 버렸다고 해요. 농협 여직원들은 범행 하루 전 날에 이상한 눈빛을 띤 3명의 범인들 모습을 기억한다고 해요. 최재만과 공범 2명을 본 여직원들은 자신들이 본 범인들이 아니라고 처음에는  경찰이 범행을 저지른 본인들이 이미 자백을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무시했다고 해요.”

삼중스님은 본격적인 구명운동을 펴기 위해 언론사 기자들과 변호사 협회를 찾아다니며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고 한다. 그 때부터 억울한 사형수 최재만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일보를 선두로 여러 신문사에서 대서특필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서울지방 변호사회 회장인 이병호 변호사는 700여 회원들의 이름으로 법무부장관에게 이례적인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최재만에 대한 재심사건의 무료 변론을 김태영 변호사가 자청해서 나섰어요. 나이 많으신 분이 열정이 대단했어요. 서둘러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재심결정이 나기 전에 혹시 사형이 집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죠. 변호사회가 공식적인 이름으로 사형이 확정된 죄수의 구명운동에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죠. 김 변호사는 최재만을 수차례 면담하고 수원지법에 보관중인 1천여 페이지가 넘는 공판기록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어요. 김 변호사는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재심 청구를 신청했어요.<제2탄 계속>”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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