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람들도 세상이란 큰감옥에 산다네”

박삼중 스님 대증언…잊을 수 없는 사형수 이야기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3/13 [18:07]

“세상사람들도 세상이란 큰감옥에 산다네”

박삼중 스님 대증언…잊을 수 없는 사형수 이야기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10/03/13 [18:07]
삼중 스님은 평생 교도소 교화로 보냈다. 그간 만난 사형수만도 600명에 달한다. 필자는 지난 3월20일 스님을 만났다. 서울구치소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곳 교화실에서 사형수와 나누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10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사형수 해담은 서울구치소 교화실에서 삼중스님의 방문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담은 감옥생활을 하면서부터 부처님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구치소 내에서 '스님'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구치소에서 부처님을 모시며, 모범 생활을 하는 사형수는 ‘해담’이라는 법명도 가지고 있었다. 삼중스님은 유난히 핼쑥해진 해담의 얼굴에서 죽음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쳐다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이 먼저 그를 향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는 구치소를 찾은 스님과 사람을 죽이고 사형수가 되어 10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해담 간의 대화 내용을 풀어쓴 것이다.
 
삼중스님은 죽음의 순간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맞닥뜨리고 있는 사형수 해담에게 자신의 요즈음 심경을 먼저 털어 놓았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네. 죽음은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하는 절차로 여겨지네. 나의 이런 마음은 한 때의 마음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온 것이네. 깨달음이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마음과는 다르다네. 지금 처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여 행복해져 있는 마음은 해담 자네의 몫이지. 이 행복한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죽음의 관문을 거친 세상은 해담의 아름다운 소유가 될 것이네.”
 
세상이란 큰 감옥에 살면서…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사형수 해담을 향한 삼중스님의 대화이자 법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정말, 평생 수행을 해왔지만 이 나이까지 와서야 겨우 죽음이 두렵지가 않네. 내 말은 내가 해담보다 잘나서가 아니네. 사형수가 아니라서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네. 지금 죽더라도 후회가 없다는 말이네. 내가 존경했던 시인 구상선생(고인)도 같은 말을 했네. 살아 있을 때 3.1절 행사에 참석하려고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힘겨워 하는 구상 선생에게 ‘많이 힘드시죠?’ 하니 ‘아닙니다. 힘들어서 지금 죽는 다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구상 선생의 진실된 마음과 같이 나도 같은 마음이라네. 지금까지 내가 가진 감량 껏, 능력 껏 최선을 다하고 살았네. 그래서 자네에게 당당하게 죽음을 말할 수 있네. 젊은 시절 스위스에 한 번 가보았더니, 정말 좋더군. 또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이었네. 죽음 이후의 새 삶도,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처럼 관문을 통과하면 된다네. 지금 자네가 하루하루 용서를 빌면서 아름답게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자네의 새 삶은 그대로 아름답게 꾸며질 것이네. 새 삶 역시 지금 살고 있는 자네 몫이네.”
 
삼중스님은 자신도 다가올 죽음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이기도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사형수 해담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해담 자네는 나에게 참으로 행복한 마음을 건네주고 있네. 해담이 살아온 시간 중에서 이곳에 갇힌 10년의 세월. 이 세월이 해담 자네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틀, 세상이란 큰 감옥에 살면서 매일매일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네.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 놓고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아. 감춰진 죄에 대해 미처 용서를 받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지. 세상 사람들과 사형수 모두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점에서는 같다네. 단지 환경만 다를 뿐이야. 그래서 내가 처한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네. 지금 내 환경이 좋고 나쁘다는 생각에서의 행복이란 없는 거네. 내가 처한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네. 내가 내 환경을 그대로 순응하며 받아들이면 행복하고,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불편하면 행복하지 않아. 그럼 점에서 해담은 행복한 사람이야. 해담은 씻지 못할 큰 죄를 졌으니, 죄 값은 당연히 치러야지. 감옥에 갇힌 10년의 세월동안 하루하루 얼마나 많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겠는가! 피해자의 영혼을 위하여 새벽부터 잠자는 시간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108배와 금강경을 수시로 읽으니, 내가 해담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연유라네. 해담을 만나고 가면 나 역시 행복해진다네. 그래서 해담에게 고맙다는 말을 이번만은 하고 싶었네.”
 
10년 넘긴 사형수 불안한 나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을 한 건도 집행하지 않았다. 올해는 사형 미집행 기간이 11년을 넘기는 해. 전국의 구치소에는 59명의 사형수들이 수감되어 있다. 전국 형사법 교수 132명의 단체 성명서에도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사실상의 사형폐지 국가로 낙인 찍혀, 한국은 이미 ‘사실상의 사형폐지’ 국가가 되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최근 들어 연쇄 살인사건을 계기로 사형집행을 재개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결단을 내릴 시기 된 것. 그래서 사형제 폐지를 둘러싼 여론과 정부의 집행 시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해결안의 향방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특히 10년이 넘게 형을 살고 있는 사형수들은 지옥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국가적 분위기 속에서 삼중 스님이 만난 사형수 해담도 최근 들어 새벽에 잠을 깨는 순간부터 극심한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한다. 새벽 4시, 아무 미동도 없는 동료들 사이에서 조용히 부처님을 향해 금강경과 108배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운다고 한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생명을 빼앗은 피해자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해담은 감옥에 들어와서야 부처님을 알게 됐다. 칠순 노모의 자그마한 뒷모습에서 부처님을 보았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 사람들은 너를 다 살인마라고 하더라. 다들 살인마라고 너를 손가락질해도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하며 유치장 창살을 등지고 가는 허리 구부러진 초라한 노모의 뒷모습과 부처님의 환한 아우라가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고 했다. 살아 계신 부처를 보고 나서야, 그제 자신의 허황된 삶을 조금이나마 깨우치는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어머님 살아생전 효도 한 번 못해보고 끝내 어머님은 4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못난 자식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보겠다고, 아픈 몸 이끌고 면회 왔던 어머님을 저 세상에 뵈러가야죠. 저도 편안하게 그런 준비를 하겠습니다.”
 
해암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살인자에게도 어머니의 고귀한 사랑은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법. 모든 이들이 이를 말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바꿀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와 자식과의 연. 이 인연은 이 세상이 두 토막 나더라도 끊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삼중스님과 사형수 해담은 신비스러운 인연의 끈이 있었다. 돌아가신 사형수 해담의 어머님이 삼중스님과 사형수 해담에게 깊은 연을 묶어 주었다.
 
사형수 어머니의 뜨거운 모정
 
9년 전 어느 날. 부산 자비사의 주지로 있는 삼중스님에게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찾아 왔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이 수심이 가득했다. 한참을 죄스러운 듯 입을 떼지 못한 자그마한 할머니는 거의 쓰러질 듯이 고개를 숙였다.
 
“스님, 죄송합니다. 제가 스님 앞에 찾아오게 된 것은 제 자식 놈 때문입니다. 스님께 부탁드릴게 있어 미안해도 찾아 왔습니다. 바쁘신 스님께 자식이 스님을 꼭 한 번 뵙기를 여러 번 부탁해서, 죄송해도 찾아 왔습니다. 제 자식은 살인자입니다. 서울구치소에 있습니다. 면회 갈 때마다, 삼중스님을 뵙고 싶다고 간청하고 또 간청합니다. 스님, 제 자식을 한 번 만나주십시오.”
 
삼중스님은 자식을 위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약속을 했다.
 
“할머니, 그만 우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가서 자식을 한 번 만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만나러 갈 것처럼 약속을 하며, 할머니를 배웅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할머니와 철석같이 약속한 것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그렇게 두 달 뒤 쯤, 삼중스님은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의 할머니의 목소리는 울음 범벅으로 말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스님, 죄송합니다. 면회를 갔더니 아들놈이 삼중스님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네요. 스님, 아들 놈 좀 만나주세요.”
 
죄송스러운 마음에 삼중스님은 또 한 번 할머니에게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또 지켜지지 않았다.
 
“참, 약속을 두 번이나 지키지 않은 이 중생이 하루에도 여러 번 거짓말을 합니다. 그 때 당시는 ‘정말로 할머니의 자식 놈 만나주어야지’하는 거짓된 마음에서 약속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두 번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못난 변명이죠. 무척 바쁜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이 한심한 놈이 죄지은 심정이 들었든지, 불현 듯 할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면, ‘야! 이놈아! 네가 그 할머니가 돈 천만 원 들고 찾아와서 아들 놈 만나달라고 부탁했더라면, 아마 네 놈은 당장 만났을 것이다. 이 한심한 놈아!’ 오늘도 진실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내 모습을 평생 업으로 쌓으면서 살고 있어요. 지키지 못한 할머니와의 약속을 항상 내 어깨에 지고 살았어요.”
 
몇 년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사형수 해담을 만나게 됐다.
 
“저는 사형수와 첫 만남에서 첫 마디는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부모님은 살아 계시냐?’ 사형수를 둔 부모의 심경을 잘 알기에,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래 그 분들은 더 크나 큰 일 당하지 않고 먼저 잘 가셨구나.’는 마음이 들어요.”
 
삼중스님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사형수 해담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해담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제가 구치소 들어올 때 어머님 한 분이 살아 계셨는데, 4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인연
 
해담은 웃으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이 스님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삼중스님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다. 해담을 만난이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삼중스님과 사형수 해담이 면회실에서 만나 평소와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스님, 저는 스님이 언젠가는 저를 찾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제 어머님이 꼭 스님을 보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해담 자네 어머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어찌 그런 느낌이 드는지?”
 
“스님이 부산 자비사에 계실 때 제 어머님이 스님을 찾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무척 졸랐거든요. 스님을 뵙고 싶다고. 아픈 몸으로 스님을 뵙고 왔다면서 ‘언젠가 삼중스님이 너를 만나러 올 것이다’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3년 전에 스님을 만나는 순간, ‘아! 어머님이 스님을 나에게 보내셨구나!’라고 느껴, 어머님께 고마워했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어머님의 얼굴을 다시 뵙는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삼중스님은 이제야 자신이 죄지은 할머니와 약속의 짐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삼중스님은 사형수 해담을 더 자주 만나 깊은 정을 주고 있었다. 사형수 해담은 자신의 수감생활 이모저모를 삼중스님에게 전했다.
 
“스님, 어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감방 동료가 저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말하더군요. 제가 생활하는 모습을 3달 동안 지켜보았다면서, ‘내가 출소하면 자네에게 피해를 입은 가족에게 말하겠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해서 조금이라도 용서를 자네 대신 빌고 싶네.’ 그 동료는 피해자 가족을 알고 있는 수원 주먹계 우두머리였어요. 제가 주먹을 썼던 그 옛날에 만났던 선배였죠. 3달 전 제가 수감하고 있는 감방에 들어왔어요. 저를 보자마자 악수를 하면서 울먹울먹하더군요. 10년 전에 만났던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안쓰러워 그랬는지. 그 동료와 말을 마치고 한 10여분 쯤 지나서, 감방 문이 덜컥 열렸어요. 감방 문만 덜컥 열리는 소리에도 간이 오그라드는데, 어제는 내 번호까지 부르면서 ‘이리 나와’하는 순간, 그때 죽음의 순간을 접했습니다. 그 짧은 3~4초 시간에 많고 선명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일 삼중스님이 온다고 했는데 오늘 오시는 날이 아닌데, 아까 저 선배가 내가 살아있는 모습을 전하겠다고 한 말이 마지막으로 듣는 용서의 말이었나? 내가 모시고 있는 부처님은 누구에게 전달하지? 고마운 수양 누님께도 마지막 말을 드리지 않았는데....... 주마등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스치는 불안감으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불쌍해 보았던지, 교도관이 ’‘oooo번, 네가 기동대 당번이잖아! 빨리 나와!’ 하는 소리에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고 하루를 살았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삼중스님은 어느 보살님이 좋은 데 쓰라고 주신 봉투를 그대로 사형수 해담의 영치금으로 맡겼다.
 
“내가 쓰는 것보다 해담 자네가 이곳에서 쓰는 것이 더 나을게야. 지난해에도 감방 생활을 비관해서 자살하려고 했던 동료를 구한 사람이 자네였지 않는가? 자네는 나보다 죽음을 참 행복하게 준비하고 있네. 해담 자네는 세상에 남겨진 게 하나도 없지 않는가? 재산 정리할 것도 없고, 죄는 죗값을 치러 용서받고 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겠나? 진정한 중은 망태와 적삼만 있으면 되는데 해담 자네에게 해당되는 말일세. 나는 이사를 가려면 아마도 트럭 몇 개가 있어도 모자를 걸세. 그래서 죽음이 두려울 수 있는 거라네. 사람들 모두 둔한 인생을 살고 있지. 언제 죽을 줄 모르니, 있는 것 다 쓰고 죽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그냥 죽음을 맞이하지. 대기업 총수들, 유명 인사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거쳐야 할 곳은 한 곳이라네.”
 
*필자/브레이크뉴스 논설위원. 수필가. 이화여대 국제사무학 학사, 서강대학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인덕대학 전 전임교수. 경인여자대학 전 전임교수. 저서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한국 금융연수원 공저)'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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