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서 큰자비 베풀다 형장이슬된 사형수

<삼중 스님 대증언> 잊을 수 없는 사형수 이야기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9/09/07 [21:40]

감옥서 큰자비 베풀다 형장이슬된 사형수

<삼중 스님 대증언> 잊을 수 없는 사형수 이야기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09/09/07 [21:40]
인간 본성 그 자체는 강한 도박성이 있다, 단지 적고 많음의 차이일 뿐이다, 놀음판을 기웃거리다가 사형수가 된 사연이 있다. 그 뒤안길에는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이 있다. 서채택 사형수는 스님으로 다음 생을 살고자 소원했다. 다음 생인 현생은 수도승으로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23년 전의 소원대로 착한 스님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서채택 사형수가 스님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는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의 두 딸들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었다. 자신의 눈에 비쳐진 스님들에게서 착한 마음을 담았다. 어린 두 딸을 거두어서 잘 보살피는 비구니 스님의 은덕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도소를 제 집인 양 드나드는 삼중스님에게서 감동에 받았기 때문이다.

서울구치소에서 있는 사형수들에게는 가장 기쁜 일이 있었다. 면회실에서 삼중스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면회실의 호출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몇 분간의 고비를 넘겨서라도 목을 빼고 삼중스님을 기다렸다. 서채택 역시 삼중스님의 반가운 얼굴을 기다리는 사형수들 중의 한 명이었다. 삼중스님이 최재만 사형수를 살려낸 소문은 전국 교도소를 강타했다. 모든 사형수와 재소자들은 삼중스님의 장삼자락에 삶을 매달렸다. 서재택 사형수는 고금석 사형수의 집행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평안하게 삶을 정리하는 고금석은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믿게 했다. 육체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삼중스님에게 목빼는 이유
 
▲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서채택도 고금석과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어 했습니다. 고금석은 다른 최고수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떠났습니다. 고금석이 떠난 후 서채택은 자신의 소망을 말하더군요. ‘다음 생에는 스님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가 스님이 되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린 두 딸에 대한 진한 사랑이었습니다. 두 딸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비구니 스님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처님을 간절히 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자로서의 길을 택한 것은 그의 숙명과 같았습니다.”
 
서채택은 시골 촌부였다. 어린 두 딸을 두고 아내는 집을 나갔다. 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비구니 스님이 두 딸을 거뒀다. 서울 근교의 절에 있는 공양심 넘치는 범패(염불을 잘하는 스님)를 잘하는 스님이었다. 서채택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딸을 보살피는 스님에 대한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두딸을 보살핀 스님 은혜
 
“비구니 스님처럼 숨어서 좋은 덕을 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스님을 두서너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극구 말렸습니다. 깊은 뜻이 있었죠. 서채택의 어린 딸들에게 행여나 해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절에서 학교를 보내면서 잘 성장했습니다. 서채택이 집행을 당한 후 대학생이 된 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올곧게 성장한 모습에서 비구니 스님의 사랑이 쌓여 있었습니다. 흐뭇했습니다. 참 은덕이 깊은 스님에게 고맙다는 절을 여러 번 했습니다.”
 
서채택이 부처님에 대한 생각은 간절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부처님의 은덕을 고마워했다. 그는 시골의 순박한 촌부였다. 한 해에 두서 차례 밭떼기 장사를 하곤 했다. 농촌의 농한기에는 어김없이 삼삼오오 이웃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인다. 화투판이 주로 벌어진다. 그는 놀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이웃 친구들이 치는 화투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채택은 그 해 가을철에도 밭떼기 장사가 잘되었나 봐요. 화투판에서 구경하고 있는 그에게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답니다. 사건의 발단에는 언제나 돈이라는 놈이 껴있습니다. 자신의 쌈짓돈까지 꿰고 있는 친구이니 발뺌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돈 2백만 원을 친구에게 빌려 주었어요. 갚은 날짜까지 약속을 거듭 받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친구는 빌린 돈을 몽땅 잃고 만 것입니다. 20년여 전 2백만 원은 굉장히 큰돈입니다.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한 화투판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만약 친구가 돈을 땄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화투판 빌려준 돈이 화근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그는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는 소식이 없었다. 참다못하여 저녁나절쯤 친구의 집에 찾아갔다. 저녁밥상에 앉아 있던 친구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에게도 술을 권하였다. 술이 얼큰해지자 그는 돈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한 돈 이야기에 술이 거나해진 친구는 고함을 질렀다. ‘무슨 소리냐?’는 호통이었다. ‘화투판에서 빌린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무지한 촌사람의 주장에는 당할 자가 없었다.
 
“당연히 돈을 빌렸으니 갚아야 하는 게 맞는 말이죠. ‘네가 돈을 빌려주지 않았으면 내가 돈을 잃지 않았을 게 아니냐?’ 이런 억지에 분통이 터졌다고 합니다. ‘네가 돈을 빌려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빌려주지 않았느냐?’ 화투판에서 돈을 빌려주면서 개평이나 뜯는 사람으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감정이 난 것이죠. 무지한 촌사람일수록 교묘한 잔꾀를 발동시킵니다. 본래 ‘도박장에서 서로 거래한 돈은 무효이다’는 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서로 도박을 함께 하면서 빌려주는 돈에만 해당이 됩니다. 도박을 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절대로 적용할 수 없는 해석이죠.”
 
시골 촌사람인 친구는 어려운 법해석을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완곡하게 주장했다. 막걸리의 취기는 오를 대로 올랐다. 서채택은 배신감에 울분을 터뜨렸다. 서로 멱살을 잡았다. 몸싸움으로 발전되었다. 친구는 ‘밭에 가서 한판 붙자’면서 서채택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논에서 뒤엉켜 몸싸움
 
“집 앞 논에서 서로 뒤엉켰다고 하네요. 힘으로 감당이 안 되었던지 친구는 자신의 집에서 곡괭이를 가지고 나왔데요. 곡괭이로 서채택의 정강이를 먼저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곡괭이를 빼앗아서 내려친 게 친구의 머리에 맞았나 봐요. 친구가 땅에 꼬꾸라지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촌부의 무지함에 시신을 땅을 파고 묻어 버렸어요. 너무 엄청난 사건은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얼떨결에 한 행동에는 반드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싸움에서 사람이 죽었다. 세상을 살면서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 벌어졌다. 누구나가 다 당황한다. 이 순간에는 반드시 자수를 해야 한다. 자수를 하면 어떠한 사건이라도 정상참작이 된다. 처음부터 살인의 목적을 가지고 한 일이 아니니 그리 큰 죄로 치부하지 않는다. 정당방위와 과실치사로 처리된다. 그런데 암매장이라는 결과는 앞의 사건을 다 뒤집어 버린다.
 
“만약에 서채택이 시신을 암매장하지 않고 경찰에 자수 할 경우에는 간단합니다. 단지 집행유예라는 죄명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곡괭이로 내 정강이를 먼저 내리쳤다.’ 과학적인 수사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습니다. 방어하고자 홧김에 곡괭이를 던졌는데 이마에 맞아서 그리되었다는 변호로 맞설 수 있습니다. 정당방위라는 차원으로 재해석됩니다. ‘무죄’ 아니면 ‘3~5년 집행유예’로 끝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뒤집어졌습니다. 시신을 암매장하던 중에 땅에 떨어진 돈을 주은 것이 또 다른 화근을 불러 들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도살인죄로 구형을 받았습니다. 촌부가 사형수로 둔갑이 된 것입니다. 그 시절은 100% 자주 집행이 되는 때였습니다. 돈이 이리 도박이 이리 무섭습니다.”
 
암매장이 사형수로 둔갑
 
사건은 뒤집어졌다. 사형이 구형되었다. 땅에 떨어진 돈을 줍지만 않았어도 강도라는 앞머리가 붙지 않는다. 강도라는 죄명에 족쇄가 덧칠해져서 사형수가 되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강도 목적으로 살인을 했다는 초점에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최고 구형이 떨어진 것이다. 아무리 사건의 전말을 잘 설명하더라도 경찰수사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진다. 사형수들은 죽음을 문 앞에 서서 진실을 털어 놓는다. 거짓이라는 허물은 살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장난질이다. 언제 죽을지 아니 오늘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시간에 무엇을 숨기겠는가?
 
“사실 사형수들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기묘한 행운아입니다. 세상 밖 모두 자신의 죽음이 언제일지 모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다 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빛과 모습은 남다릅니다. 서채택 사형수는 불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에 대한 해답을 부처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이생은 죽으면 다음 세상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증명하느냐고요?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육체가 소멸한다고 해도 삶이 죽는 게 아니다. 육체 안에 있는 마음의 세계에는 죽음이 없다. 육체의 집이 무너지고, 집이 없어지면 집으로 들어올 수 없다. 다음 생이라면 어떤 삶인가? 자신의 마음에 따라 집이 결정된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쓰면 다음 생은 더 행복한 집을 갖게 된다. 그러나 짐승과 같은 마음을 쓰면 다음 생은 짐승으로 태어난다.’ 서채택은 다음 생을 믿었습니다.”
 
부처님이 증명하는 다음 생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부처님은 착한 마음을 고귀하게 여겼다.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은 서채택은 부처님 마음이 되었다. 촌부가 강도살인죄라는 사형수라는 족쇄에서 벗어났다. 이 세상 척박한 감옥에서 불교의 진수를 깨달았다. 그는 부처님 마음으로 변하기가 쉬운가? 아니다. 사형수라는 족쇄가 그의 사욕을 버리게 만들었다.
 
부처님의 마음으로 자비
 
“살면서 복과 덕을 쌓아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다음 생은 현생에서 형성됩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그리 태어나지 않습니다. 서채택은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어린 두 딸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스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착한 스님으로 태어나서 부처님 곁에 살고자 소원했습니다. 그는 스님이면 모두 다 착한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도 그리 착한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참으로 좋아 보였습니다.”
 
불자,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수녀, 모든 성직자들은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 성직자들의 모습에서 중요한 덕목은 착한 마음이다. 비춰진 마음이 착하게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 착한 마음이 바로 포교이며 전도의 지름길이다. 삼중스님은 모든 성직자들을 좋아한다. 특히 수녀님들의 착한 마음씨를 좋아한다.
 
“서채택의 눈에 비쳐진 불자는 자비와 착한 심성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딸이 부처님 곁에서 살고 있으니 애타는 사랑에서 다음 생을 기약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짧게 남은 생이나마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부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형수 자신이 죽음 앞에서 절박한데 무슨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인지 사람들은 묻습니다. 풀리지 않는 해답은 감옥이라는 세계에서 나옵니다. 미결수인 사형수는 경제적인 여유가 생깁니다. 같은 방에 있는 재소자들 중에는 경제사범들이 한두 명은 끼어있어요.”
 
사형수는 경제적으로 여유
 
감옥 안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함께 지낸다. 온종일 좁은 방에서 삶의 허물을 고스란히 들어낸다. 별의별 사람들 중에는 재벌총수도 있을 수 있고,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도 들어온다. 한방에 혼거 시킬 때 교도소 당국이 사형수 방에는 꼭 경제사범들과 같이 있게 하는 배려(?)가 있다고 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사형수에게 영치금을 넣어줍니다. 짐승보다 못하게 여겼던 사형수들에게 돈을 줍니다. 360도 생각을 변화된 것입니다. 물론 종교를 믿지 않는 못 된 몇몇 사형수들도 있습니다. 감방 안에서도 포악한 사형수들이 내뱉은 말은 듣기에도 거북한 내용이 많습니다. ‘오늘 밤 너 눈을 빼버린다’는 협박은 아주 일상적인 표현입니다. 사형수의 서슬 퍼런 눈빛이 마주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죠. 처음으로 들어온 감옥 안에서 살벌한 사형수와 함께 혼거를 한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칠 것입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믿는 사형수들의 모습은 성자이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새벽기도, 좌선하는 모습, 싱긋이 웃는 얼굴에 모두들 반한다. 사형수는 처음 들어 온 재소자를 배려한다. 사형수가 성자의 모습으로 둔갑된다. 죽음에 애닮은 모습에서 초월된 삶을 직접 지켜볼 수 있다.
“저도 반합니다. 죽음을 초월한 자비로운 행동은 감방 사람들을 끌어안습니다. 자신이 똥통 옆 자리에 앉습니다. 감동하죠. 같은 방을 쓰는 재소자뿐만 아니라 옆방에 있는 재소자들이 나가면서 영치금을 넣어줍니다. 교도소안도 세상살이를 하는 곳입니다. 자신이 쓰는 생필품은 자신의 돈으로 사야만 합니다. 영치금을 독거수들과 나누어 씁니다. 이런 모습을 주변 재소자들은 지켜봅니다. 서채택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두 딸이 있는 절에도 조금은 보내주었을 겁니다.”
 
스님으로 환생하여 수도승
 
서채택은 그의 소원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떠났다. 그 시절은 일 년에 서너 차례 집행을 했던 때였다. 형집행장에서도 유언을 남겼다. ‘다음 생에는 스님으로 오겠습니다. 내가 다음 생에 스님이 되게 하기 위해 부처님이 이리 만드신 것 같습니다.’ 삼중스님은 비구니 스님 절에 가서 그의 두 딸을 만났다. 비구니 스님에게 자란 두 딸은 착한 마음씨를 본받았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출가했습니다. 대구 해인사를 2백리 걸어갈 때, 스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세상의 발을 다시는 딛지 않고 사는 스님, 고고하게 신선같이 사는 스님,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으로 사는 스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아주 나쁜 사람과의 인연이 있었습니다. 어린 서절 내 마음에는 고모와 고모부가 그리 악하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싸우려 했습니다. 복수하려고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검사가 되어 그들을 지옥에 몰아놓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그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검사가 된다고 해서 복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자식이 있었습니다. 복수는 악순환이 됩니다. 내 자신이 먼저 복수하는 마음을 끝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게 스님의 길인 줄 알았습니다. 착한 스님으로 살고자 출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삼중스님은 착한 마음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했다. 자신의 출가 동기를 밝혔다. 착한 마음은 삼중스님에게서 쏟는다. 삼중스님의 40평생을 가시밭길에서 착한 마음을 심었다. 등을 떠밀어도 아무도 해내지 못하는 사형수들과의 교류를 한평생 지켰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부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형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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