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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500통 보내온 선상반란 조선족사형수
박삼중 스님 대증언-잊을 수 없는 사형수 이야기
 
김성애 논설위원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 전재천은 원양어선을 탔다. 선상반란 주모자로 전재천은 사형수가 되었다. 미결수인 사형수는 돈이 생긴다. 12년간을 사형수로 지냈던 조선족 전재천은 감방 안에서 꼬박꼬박 고향에 돈을 붙였다. 삼중스님은 특별면회를 수십 차례 하면서 그가 토해내는 절절한 가족사랑에 그만 반했다. 12년간 보내 온 500여 통의 편지마다 중국 진양에 살고 있는 노모와 자식들의 그리운 사랑이 넘쳤다.
 
전재천의 아버지 전정기는 일제강점기에 김복대, 김학철이 이끄는 독립유격대의 소속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후 그의 가족은 만주에 남아 화전을 일구면서 농사를 지었다. 전재천이 14살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가세는 더욱 기울었고 흙벽의 초가집에서 가난과 배고픔을 견디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독립운동가의 아들 전재천은 고국에 돌아왔으나 사형수가 되었다.
 
페스카마호 선상살인
 
1996년 조선족 선원 6명은 해양살인사건을 일으켰다. 참치 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는 남태평양 한가운데서 선상반란이 일어났다. 선장과 갑판장 등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해 11명의 선원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배를 탈취한 후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조선족들과 격투를 벌여 반란을 제압했다. 이들은 일본경비정에 인도되어 곧 바로 부산해양경찰에 인계 됐다. 
 
▲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1심에서는 전원 사형, 최종 대법원에서는 1명 사형, 5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건 가해자인 조선족들은 한국인 선원들이 자신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한 참혹한 상황을 증언했다.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선상반란은 어쩔 수 없이 발생했다는 배경을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실을 담고 있는 숨은 뒷이야기를 삼중스님이 대신해서 털어놓았다.
 
“전재천의 증언을 토대로 한 내 개인적인 소견일 뿐, 피해자에 대한 명예를 더럽히려 할 의도는 없습니다. 또한 유가족들의 상처를 덧새기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전재천이라는 한 개인의 삶과 슬픈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이니 이해바랍니다. 그러나 1996년에 일어났던 선상반란사건의 역사적인 재평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선족 무기수들 전원을 고국인 중국으로 추방시키는 인도적인 절차가 이루어지길 희망하는 바람입니다.”
 
주모자 누명쓴채 사형수
 
삼중스님은 언론을 통하여 선상반란사건을 처음으로 접했다. 27개 시민단체는 조선족 사형수의 억울한 사연에 힘을 합쳤다. 선상반란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주모자의 누명을 쓴 채 전재천은 사형수가 되었다. 삼중스님은 특별면회를 통하여 처음으로 전재천을 만났다. 죽음을 앞둔 그는 순박한 눈빛으로 고마움에 웃고 있었다. 진실이 왜곡되어 살인자로 변해버린 그의 원양어선 선상일기는 눈물겨웠다.
 
“전재천은 원래 중국 휘남현 조선족 중학교에서 13년간 근무한 교사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세 자식을 부양해온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어요. 고3딸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사월급만으로는 학비를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비 마음으로 딸을 대학에 보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2등 항해사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취득하여 원양어선 선원이 되었습니다. 1996년 6월 16일 한국어선 페스카마 15호에 승선했습니다. 선장과 한국인 선원, 조선족, 인도네시아 등 23명과 함께 어로작업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지도부인 한국인 선원들과 조선족들 간에 내분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답니다. 선상에서 조선족들이 선장과 갑판장으로부터 심한 학대와 폭언을 당한 듯싶습니다. 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으면서 하루에 작업 21시간을 흐리멍덩한 정신 상태로 지냈다고 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바다에 내던져 죽여 버리든지, 섬에 버리고 간다는 협박이 난무했다고 합니다.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빌린 빚 20만원(한화 2천만 원가량)은 엄청난 큰돈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 1달동안의 가혹한 폭력은 기왕 죽는데 같이 죽자는 선상반란이었습니다.”
 
12년간 창구특별면회
 
그는 노무 일을 하는 일반 조선족들과는 달리 지도부에 속하였다. 그는 선장과 간판장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킬 만한 동기는 없었다고 한다. 학대받은 젊은 조선족들이 신세타령 속에 술에 만취되어 선장과 갑판장을 죽이기로 공모하였다고 한다. 전재천에게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을 시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재천에게 선장과 갑판장을 밖으로 불러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가 사람을 죽인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선장과 간판장을 불러냈다고 합니다. 생명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불러냈다는 공모는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면회할 때마다 ‘살려 달라. 고향에 노모가 생존해 있다.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이 있다. 형제들이 다 잘 산다. 살려 달라’는 애원했습니다. 12년 전부터 꾸준히 창구 면회를 했습니다. 특수 사건인지라라 30분을 기다렸다가 하는 특별면회만이 가능했습니다.”
 
그가 한국인 선원들의 죽음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살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란선원들을 도운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된 긴급피난행위로 볼 수 있다. 조선족 6명이 선장과 갑판장을 비롯해 자신들의 범행을 목격한 선원 11명을 수장, 살해한 사건은 일어났다.
 
경찰 사건주모자 지목
 
“전재천이 사건의 주모자로 탈색되어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해양경찰에 인계된 가해자들은 억압된 상황 속에서 수사를 받았겠죠. 경찰은 사건의 주범자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이등항해사이자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를 지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 의하면 ‘실제 주범은 백oo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경찰은 주범으로 나를 지목했다. 젊은 조선족들에게는 주범을 말하면 중국으로 보내준다며 회유했다. 경찰은 네가 나이도 많이 먹었고 배울 만큼 배웠으니 주동했다고 해라. 그러면 나이 어린 조선족들은 바로 추방시켜 주겠다. 너도 1∼2년만 여기서 지내면 추방시켜 주겠다.’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는 경찰의 말을 믿고 진술했다. 사형이 1심에서 구형되면서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서야 진술을 번복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다른 조선족들은 무기징역을 언도받게 되었다. 2002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법무부장관과 국가인권위원회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했다. 돌아오는 것은 ‘각하’라는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조선족들은 우리보다 더 순진한 면이 많습니다. 순박한 그가 사형수 신분으로 살면서 견딜 수 없는 혹독한 고통을 토해냈습니다. 모든 진실이 가려진 채 왜곡된 사실에는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변명을 하고 싶다가도 무참히 살해된 고인들과 유족들의 아픔과 슬픔을 떠올리며 해명조차 할 용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가 주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족 무기수들이 보내 온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족 용서비는 편지
 
조선족 백oo은 2004년 1월 11일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사실 그때 형님을 주모자라고 말하게 된 것은 수사관이 우리를 중국으로 돌려보낸다고 말해서 그리 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기 위해 형님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 같아 무슨 말로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해 백씨의 4월 29일 편지에서도 ‘그동안 저희들이 무심했습니다. 저희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책임을 혼자 지시고 대신 사형수로 살고 계시는 형님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이제부터 형님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또한 조선족 최oo도 2004년 1월 26일 편지에서 ‘형님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형님께서 재심을 하게 되면 형님이 주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꼭 밝혀드리도록 형제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형님 그러니 걱정 마시고 힘내세요.’라고 쓰여 있다.
 
그의 투옥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의 아내는 혼절을 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어머니가 혹여 알게 될까 싶어 미어지는 가슴만 칠뿐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삼중스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아내에 대한 정은 무척 깊었습니다.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아내가 오는 소리인 줄 알고 잠에서 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도 그리던 아내와 함께 조선족 무기수 아내 5명을 한국으로 초청했습니다. 전재천의 아내만을 초청하자니 다른 조선족 재소자들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난 뭐가 하나도 없으면서도 통 하나는 컸습니다.(웃음) 초청된 아내들을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초청한 아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전재천의 아내는 내가 보아도 참 잘 생겼더군요. 잠깐 스쳐도 눈에 확 띄는 미인이었습니다. 전재천 아내와 함께 왔던 한 무기수 조선족 아내가 부탁을 하더군요. ‘부탁이 있다. 내 남편이 무기로 15년을 삽니까? 그럼 제가 함께 살면 2명이니 7.5년만 살면 되지 않는가?’ 참 순박한 아내였습니다.”
 
초청된 조선족아내 도망
 
초청된 조선족 아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국장에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전재천의 아내만이 공항 출국장에 나오지 않았다. 잠적했다. 고향에는 빚은 쌓여있고, 온 김에 돈을 벌 요량이었다. 달리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초청한 나까지 속였습니다. 그 아내가 도망가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알고 있었는데…. 만약 도망가지 않았어도 내가 도망가라고 할 판인데……. 그의 아내는 밀입국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대전에서 법회를 열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용서를 빌더군요. 그래서 ‘용서할 게 없다. 잘 했다. 애들 3명 중 막내아들의 학자금이 필요했을 게 아니냐?’ 이런 내 말에 많이 울더군요. 하도 안쓰러워서 일하고 있는 대전의 식당에 가 보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다리가 아파서 서 있기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철이 없는 막내아들은 돈 붙이라는 전화만을 한다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괴로워서 술을 먹는다고 하더군요. 많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돈 몇 푼을 손에 쥐어 주었더니, 그 돈으로 술을 먹자고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아내는 형무소로 이혼서류를 보냈다. 여자들은 빤한 사정으로 잔인했다. 사형수로서 그리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도장을 찍도록 했다.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여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전재천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울면서 도장을 찍어줬다. 그 때부터 그의 시력은 점점 나빠졌다.
 
이혼도장 후 시력실명
 
“그는 아내가 보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후, 몇 달간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혼으로 너무나 힘들어 했습니다. 감옥에서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을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시력이 악화되었습니다. 눈 수술을 여러 차례 했지만 거의 실명상태에 있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가 말하더군요. ‘속된 말로 내가 사랑하니, 행복해야 되지 않겠느냐?’ 지금 생각해 보아도 너무했다는 마음은 남아있습니다. 그 뒤에 그의 아내가 나에게 전화를 했더군요. 자신도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단호하게 ‘앞으로 나에게 전화하지 말아 달라.’ 불편한 심정을 내 비쳤습니다.”
 
전재천의 삶은 이리도 꼬였다. 아내와의 이혼, 실명위기,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만 갔다. 그의 또 다른 아픔은 바로 팔순 노모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형수가 된 사실을 모른 채 7년을 지냈다. 그러나 아들이 오랫동안 집에 오지 않는 것과 편지만 올 뿐 사진을 보내지 않는 것을 수상히 여겼다. 어머니의 성화로 결국 가족들은 그의 투옥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삼중스님은 그의 두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가지 일부 학자금을 지원했다. 큰딸은 의사, 작은 딸은 고등학교 일본어 교사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결국 몸져누웠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죄가 다 자신의 죄라며 통곡을 했다는 소식에 그 또한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근심을 걷잡을 수 없다는 편지에는 눈물을 온통 담았습니다. 2006년도 그가 내게 돈 100만원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장성한 두 딸이 동시에 합동결혼식을 올린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애비로서 마지막이 될 줄 모르는 이 현실에서 형무소에서도 애비노릇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백만원빌려 딸결혼선물
 
딸 둘이 합동결혼식을 하는데 금목걸이를 만들어서 선물로 보내고 싶다는 애절한 부정이었다. 그는 자식에 대한 부정은 끔찍이도 애틋했다. 두 딸에게 5십만 원짜리 금목걸이를 만들어 결혼선물을 전해주고 싶어 했다. 애비마음 절절, 자신이 사형수로서 내일이라도 죽을 줄 모른다는 절박함에 그는 삼중스님에게 매달렸다.
 
“돈 백만 원을 사형수가 어떻게 갚을 수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재천은 워낙 착하니 감옥에서 돈이 생깁니다. 사형수는 미결수이므로 경제사범들과 한방에서 생활을 합니다. 돈이 있는 경제사범들은 불쌍한 사형수에게 영치금을 종종 넣어줍니다. 그는 돈이 모아지기만 하면 몽땅 중국에 송금합니다. 때놈이니 한 푼도 안 쓰고 중국에 있는 두 딸과 아들을 챙겼습니다. 그는 금년 내로 돈을 모아서 갚겠다며 돈 100만원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찾아가서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감옥에서 모은 돈을 어찌 내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딸과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금목걸이를 금방에서 2개를 만들었습니다. 창틀 넘어 자신이 디자인했던 금목걸이를 보는 그의 눈빛은 행복이 넘쳐흘렀습니다. 이런 행복한 그들의 눈빛 때문에 저도 행복하니 언제나 그들의 덕에 삽니다.”
 
삼중스님은 금목걸이 들고 그를 대신하는 여행을 준비했다. 노란 장삼을 입고 2006년 4월 중국 장춘으로 향했다. 결혼 선물을 두 딸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물론 그의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였다. 45년 동안 삼중스님은 사형수들의 어머니를 많이 보아왔다. 부모들이 겪는 고통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의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예수님이 보내셨죠?
 
“전재천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입니다. 그의 노모는 나를 보자마자 ‘예수님이 보내서 왔습니까?’하며 반갑게 손을 잡았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주변에 있던 식구들이 당황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되레 ‘맞습니다. 좋은 예수님이 저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아드님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며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전재천을 데려와서 어머니 품에 안겨드리겠다고 진심이 담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의 노모가 사시는 동안만이라도 좋은 희망을 안고 사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삼중스님이 산골 진양에 왔다는 소식으로 마을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 농촌 60년대 풍경이었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한 소리를 했다. ‘우리가 스님을 환영해줘야 재천이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잔치 자리에는 전재천의 옛 스승과 제자 등 20여 명의 동네유지들이 모였다. 이들 모두는 “전재천은 본성이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절대로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전재천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를 융숭히 대접했습니다. 한명씩 돌아가면서 공손히 술을 권하였습니다. 제가 술을 거절했습니다. ‘오늘은 이 술을 마실 수 없다. 단 만분의 1의 가능성이지만 그리도 원하는 전재천이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애를 쓰겠다. 그때야 당신들이 주는 술을 마시겠다. 내가 전재천과 같이 손을 잡고 어른들을 다시 뵐 때는 미친 듯이 술을 마시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노인들이 박수치면서 좋아했습니다. 전재천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도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이 말하더군요. ‘우리가 전재천 대신 사형장에 갈 수 있다.’ 이런 진심어린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방송국 시사프로그램
 
전재천과 같이 확정된 사형수가 재심을 통해 석방된 예는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의 석방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중국 국적을 가진 그를 한국정부가 인도적인 차원에서라도 추방을 통해 중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구명만이 남아있다.
 
“2006년 7월, ooo 방송국의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선상반란사건’을 재조명했습니다. 5명의 조선족들의 증언을 비롯해 한국인 생존자 이oo씨의 증언을 방영했습니다. 사형수 전재천의 주장과 그의 가족이야기를 꾸몄습니다. 그를 구명하기 위한 중국 길림성 교원과 기독교회 등 약 20만 명의 조선족들이 나섰습니다. 한국 대통령과 법무부장관 앞으로 줄기차게 탄원서를 보내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한국내의 27개 시민단체들도 ‘전재천에 대한 사형 판결은 과중하다.’는 탄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그가 결국 2008년 1월 1일 무기로 감형되었습니다.”
 
그는 12년 간 사형수로 지내며 하루하루를 피가 마르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삼중스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눈물이 절여 있었다. 무기로 감형 받은 감격을 편지에 적었다.
 
무기감형된 감격편지
 
“존경하는 삼중 큰 스님께 올립니다. 스님, 오늘(1월 1일) 보안과장님으로부터 법무부장관 명의의 감형장을 받았습니다. 「감형장, 사면법 제5조 제1항 제4호의 규정에 따라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변경하는 대통령의 명령이 있으므로 이에 감형장을 발부함. 2008년 1월 1일. 법무부장관」감형장을 받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너무 큰 기쁨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어떠한 말로도 당시의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한편 저희들 사건으로 고인 되신 분과 유가족 분들에 대한 죄송할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과연 감형 받을 자격이 있는지, 저로 인해 유가족들을 더욱 슬프게 해드리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봅니다. 지금까지 고인과 유가족을 향한 용서에 대하여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죄로 인한 고통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일상에 늘 죽음이 머물러 있어서 두려운 오늘 하루와 내일은 먼 미래가 되었습니다. 감형에 대한 마음은 쉽게 글로 풀어낼 자신은 없지만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제 곧 다른 곳으로 이송가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삶이 시작되겠지만,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며 남은 생을 자숙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고인께 명복을 빌며 유가족 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삼중스님은 내은인
 
무엇보다 저에게 오늘의 감격을 주기 위해서 지난 11년간 긴 세월 동안, 삼중스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하셨습니까. 오늘 날의 제 생명은 여러분들께서 주신 것입니다. 삼중스님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시고 보호자였습니다. 나에게 여러분이 안계셨다면 지금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재생은덕은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지면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만 먼 훗날 기회가 온다면 그때 보답하겠습니다.
 
감형장을 받아 들고 보안과 문을 나서니 세상은 전에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코끝에 와 닿는 공기도 전에 없이 상큼한 것 같고 푸른 하늘도 더 아름다워 보였고 창공을 나는 새들, 바람 한 자락 심지어 나무 이파리의 삶까지도 새로워 보이는 정겨움에 가슴 벅차 올랐습니다. 이 모든 기쁨과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항상 내 삶을 지탱해 주신 스님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른 교도소에 도착하면 소식 드리겠습니다. 2008. 1. 1. 부산에서 전재천 드림”
 
무기수로 감형된 그에게 죽음의 공포와 고통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참회의 마음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될 것이 자명하다. 삼중스님은 종파를 초월한 구명운동을 한다. 아들의 석방을 기원하는 노모의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불러온다. 그의 노모가 던진 한마디가 응답했다. ‘예수님이 보내서 왔습니까?’
 
고국(중국)으로 추방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그에게는 마지막 구명운동이 남아있습니다. 고국(중국)으로 돌려보내는 길입니다. 그를 비롯한 중국 조선족 무기수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구명운동입니다. 형이 확정된 사형수가 재심을 통해 석방된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만 중국 국적을 가진 그를 한국정부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중국으로 추방하는 소망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를 노모의 품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내가 먼저 쓰러질지 모릅니다. 그도 이곳에서 13년간이나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중국으로 보내어 그곳 형무소에 살게 하던지 석방 하던지 자국 국적자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
 
삼중스님은 그의 노모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한다. 무리한 욕심일 수 있다. 전재천은 현재 대전교도소에 무기수로 실형을 살고 있다. 무기수들이 많은 대전교도소는 각박하다. 무기수들은 평생 감옥에 갇혀있다는 현실에서 남을 배려할 정신적 여유는 없다. 그러니 죽음의 공포에 감싸인 사형수보다 어찌 보면 더욱 힘든 하루의 일상이 짓물린 곳이다. 300~400여명의 무기수들 중 오직 조선족 무기수는 한 명뿐이다.
 
“전재천은 신앙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되는 순간 경제적인 주변의 도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니 대전교도소에서는 돈 한 푼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요즘 같은 여름을 지내는 감옥안의 실정이란 가장 혹독한 상황입니다. 우리정부가 조선족 재소자를 추방하는 차원에서 중국정부도 이에 상응하는 한국인 재소자를 한국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권국가의 명분이 섭니다. 이미 1백만 탄원서를 중국정부에게 보냈습니다. 중국 정부에게 끊임없이 협력을 요청할 계획입니다. 전재천과 손을 잡고 그의 마을잔치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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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8/13 [23:55]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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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뉴스> 대전시, 베트남 해외통상사무소 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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