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기차안에서

수필가 박종희 | 기사입력 2007/06/28 [22:33]

밤 기차안에서

수필가 박종희 | 입력 : 2007/06/28 [22:33]
  말갛던 하늘에 저녁노을이 밀감 빛 색깔로 곱게 물들어 가던 시간. 한 달 전에 예매한 기차표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멀리서 하나의 작은 점으로 보이던 기차가 금방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삼켜버릴듯한, 회오리바람과 함께 내가 서있는 플랫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신경숙님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라는 소설의 제목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왜, 7시에 떠난다고 했는지, 기차는 언제든 떠나는 사람을 태울 채비를 갖추고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떠나고 있는데, 기차가 들어오는 불과 2,3분 정도의 플랫홈에서의 시간이 온갖 설렘과 기대를 가져다주어,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잠깐이지만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외로운 보퉁이를 하나 들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를 업고 한 아이는 걸리고, 담배를 입에 문 사람과 긴 머리칼을 끌어올리는 여자, 건너편 역구내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는 연인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들이지만 역사에서 만나지는 사람들이 모두들 정겹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우린 모두 어딘가를 향해 떠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라 그런 것 같다.

  가끔씩 아주 어렵게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내 번호가 써져있는 좌석에 앉아서 기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분명하지 않은 기차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방인들을 태운 기차는 이내 잠깐 멈추었던 역사에 기적 음만을 남겨두고 홀연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떠날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 홀가분함.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고 멀리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꼭 반딧불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 것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움직임이 조용조용해지는 밤엔 왜,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는지. 낮에 보면 아무것도 아닌 풍경들도 밤엔 불꽃놀이를 하듯 예쁘게 그려지는 동네의 모습이 긴장되어 있던 가슴을 정겹게 녹여주었다.

  온통 까맣게 보이는 유리창에 가만히 내 얼굴을 비춰본다.  이내 피곤에 젖어 눈꺼풀이 내려앉은 한 중년의 여자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밤길을 달리는 기차처럼 심하게 덜컹거리며 살지는 않았지만 내 또래의 다른 주부들에 비해서는 난 참 많이 바쁘고 숨 막히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다. 

  꼭 꼬집어 말하라고 하면 무엇 때문에 힘들게, 그리고 항상 시간에 쫓겨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제껏 옆도 뒤도 한가로이 돌아다 볼 겨를 없이, 어느 집에서나 말잘 듣는 성능 좋은 세탁기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유일하게 나를 돌아다 볼 수 있는 이 시간. 눈을 감고 조용히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법정스님의 글귀에서처럼 혼자만의 여행길에서면 자기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되고 자신의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을 할 수도 있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난다.

  혼자이기에 더욱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내 영혼의 무게. 늘 깨어있는 영혼으로 죄짓지 않고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비타민 같은 사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어느 순간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차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곧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세상 밖으로 기차가 나아가듯 여행에서의 휴식으로 잠시 그늘졌던 내 삶의 그릇을 다시 환하고 원숙한 그릇으로 채우고 싶다.
충북 출생.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충북여성문협회회원. 충북수필가협회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회원. 중부매일 에세에뜨락 수필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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