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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희의 '삶 그리고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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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을 꿈꾸며.
 
수필가 박종희


  시원하게 등목을 한 그가 웃는다.
 
  연일 삼십 도를 넘나드는 더위가 식을 줄 모르고 대지를 달구던 날 날씨때문에 미루어 오던 세차를 하러갔다. 남들이 보면 그깟 작은 차 세차할 게 뭐 있겠냐고 하겠지만 작은 차라도 몇 달을 그냥 탔더니 원래 누런색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얼룩이 지고 지저분하기는 차 안도 마찬가지였다.
 
  주유를 하고 나면  서비스로 세차를 해주는 주유소에서 가끔 공짜 세차를 하기도 했지만 왜인지 나는 자동세차를 하는 것이 두렵고 세차하는 동안 차 안에 있으면 멀미가 나서 촌스럽지만 아직도 손세차를 하는 세차장을 찾아다니게 된다.
 
  사무실에서 가까워 단골로 가던 세차장 주인아저씨는 처음 몇 번은 성의 있게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마른걸레질도 잘 해주더니 단골이 되고 나서부터는 세차 하는 것이 건성이다. 소형차라고 얕보는 건지 세차를 자주 하지 않아 때가 너무 찌들었다는 둥, 닦아도 빛이 나지 않으니 왁스칠을 하라며 장삿속을 내보인다.

  한 눈에도 들쑥날쑥 걸레질한 흔적과 차 안 구석에 그냥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날엔 영 기분이 찜찜해진다. 구석구석 먼지를 떨어내다 오래 전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을 발견한다. 목욕을 하고 나와 귀걸이를 하다가 잃어버린 후 애써 찾아도 없더니만 그가 꼭꼭 숨겨 놓고 입을 닫고 있었나 보다. 켜켜이 먼지 쌓인 볼펜과 동전, 건망증 때문에 마트에 가려고 적어놓은 메모지와 즐겨듣던 음악 테이프 등 세차를 하다보면, 잡다한 것들이 나오곤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걸레질을 하는 세차장 부부한테 마티즈가 시원스레 몸을 맡기고 있다. 대형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도 기를 쓰고 들이대는 더위에는 못 당하는 듯 오히려 더운 바람을 몰고 온다. 비누칠로 한 차례 때를 벗긴 뒤 두 사람은 호스를 들고 등목을 시킨다. 그는 얼마나 시원하고 개운할까? 찬물을 쏟아 부을 때마다 그의 웃음이 등 뒤로 새하얗게 쏟아진다.
 
  그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7년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가까워진다. 그 동안 줄기차게 나와 같이 다닌 셈이다. 어쩌면 자주 못 보는 친구들이나 가족들보다도 같이 한 길이 더 멀고도 길었다. 그만큼 내 속내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송두리째 안고 있었다. 어느 시간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 차를 타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 딸이 얼마나 예쁜지, 주인을 닮아 고지식하다는 그를 길들이겠다며 몇 번 장거리를 타고 다닌 남편에게도 깍듯하게 구는 걸 보면 몸체는 작지만 그의 눈썰미도 보통은 넘을 듯싶다.  
 
  내가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주로 아침 출근 시간과 저녁 퇴근시간인데 때로는 그의 생각을 무시하고 집으로 가는 도로가 아닌 다른 확 뚫린 고속도로 같은 곳으로 핸들을 돌려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살면서 역행성의 욕구는 아름다운 유혹이 아닌가. 스치는 바람이며 구름을 안고 달리는 기분, 그것은 각질 화된 삶으로부터의 신나는 탈출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타성에 지쳐 사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가끔씩 옛시간을 회상해 보거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세차를 하듯 마음의 묵은 때를 신선한 느낌으로 여과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떠남을 기획함으로써 생에 곁가지를 친 권태를 전지해 낼 정도로 나는 용감하지 못 했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서글픔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캄캄한 지하 주차장 안에서 핸들을 붙잡고 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도 같이 침묵했고 에프엠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에 넋이 빠져 집 앞을 지나칠 때면 내 시린  마음을 아는 듯 핸들을 돌리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가끔씩 지인들을 태우고 모임에 동반할 때도 내 자존심을 세워 주었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 어느 하나도, 때로는 남편의 흉이나 직장 상사의 흉을 보며 웃어대던 일들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으니 그것만 봐도 그는 꽤 입이 무거운 편이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 이천 킬로미터, 6년 동안 고작 이만큼 탔냐고 하는 남편의 말과는 달리 이 숨 가쁜 기록 앞에서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와 첫 대면식을 나누고 친해지기 전에 나한테 했던 거대한 신고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라이트를 켜놓고 내려 방전이 되는 날도 있었고 눈길에 미끄러져 오도 가도 못하는 날엔 고집을 부리고 움직이질 않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볼기를 후려치고 누워버린 악당 같은 구형 그랜저 앞에선 보름씩이나 시위를 하며 카센터에 들어가 아예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친구 와이프들은 모두 운전할 줄 아는데 나만 못 한다고 평생 내 운전기사가 되어 주겠다고 했던 신혼 초 약속과는 달리 시큰둥하게 구는 남편 몰래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고 나는 한 번에 면허 시험을 통과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이미 내 마음 속엔 작고 앙증맞은 개구리 왕눈이 소형차인 그가 자리하고 있었다. 면허증을 교부받고 남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선보인 시험 운전에선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

  남편한테 운전배우다가 이혼한 부부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뼈 속까지 느끼며 운전을 하다가 겪은 실수담이야말로 단편소설 한 권의 분량은 될 듯싶다. 그런 저런 고충을 같이 했던 그와 이만 이천 킬로를 달렸으니 앞으로 몇 킬로를  더 함께 달릴 수 있을지. 시간이 갈수록 나를 닮아가고 나를 인정하는 그를 보고 남편은 앞으로도 20년은 더 탈 수 있을 거라며 그를 칭찬했다.
 
  어느 사이 그가 세수를 하고 뽀얗게 제색을 찾아 내 앞에 나타났다. 기억에도 없는 고속도로 영수증 한 장이 발견되었다. 순간 숨 막히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미처 생각하지 못해 가슴이 서늘했는데 도착지가 천안으로 되어 있다.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에 시숙이 돌아가시고 나서 막내시누가 내 차를 타고 큰댁에 갔던 생각이 났다. 그 기억은 잠시 나를 안개 같은 그리움에 젖게 한다.

  빛바랜 영수증 쪽지 하나가 퍼뜩 스치며 겹쳐가는 순간들과 얼굴까지도 불러내준다. 열려진 문으로 밀려들어온 차 안 공기는 운전도 미숙한 차를 얻어 타고 마냥 뿌듯해 하시던 시숙의 정스런 미소를 뿌려준다.
 
  세차도 했으니 이번 주말에는 바람도 쏘일 겸 고속도로를 따라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 고속도로 영수증은 건조해진 내 심성에 새순 같이 여린 시심을 담보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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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5/14 [10:25]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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