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증식하는 가재가 나타났다!

정유희 서울대학교 과학사 | 기사입력 2018/05/04 [18:06]

스스로 증식하는 가재가 나타났다!

정유희 서울대학교 과학사 | 입력 : 2018/05/04 [18:06]

스스로 증식하는 가재가 나타났다!            

Q. “우리 집 식구가 속수무책으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안 줄 수도 없고요. 알을 못 갖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A. “네, 없습니다.”
 
한 포털의 애완동물 카페 질문 게시판(http://tip.daum.net/question/75607771)에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올라왔다. 바퀴벌레라도 키우는 걸까?
 
가재가 자기복제를 한다고?'
 
1990년대 독일의 수족관 애호가, 일명 ‘물생활’ 사람 사이에서 아주 독특한 생물이 인기를 끌었다. 손바닥에 올라오는 앙증맞은 크기에 대리석 무늬를 띤 민물 가재가 그 주인공. ‘마블 가재’라 불리는 이 가재는 원래 ‘텍사스 가재’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애완동물 상인이 독일로 수출한 생물이다. 그 후 마블 가재는 한배에 수백 개의 알을 낳는 엄청난 번식력으로 유럽 전역을 넘어 다른 대륙까지 빠르게 퍼졌다.
 
단지 알을 많이 낳아서가 아니다. 이 가재는 수컷의 정자 없이 스스로 복제한다. 즉 단성생식한다. 여기에 썩은 잎, 달팽이, 물고기, 곤충을 가리지 않는 식성으로 생존률이 높아 고작 10년 만에 마다가스카르와 일본에까지 나타나 토착종을 위협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침투력을 무작위적으로 퍼지는 암세포에 비유하며 ‘클론 군대’가 침략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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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암컷 하나가 자신과 똑같은 딸만 낳아 무섭게 불어나는 마블 가재의 모습 (출처: shutterstock)
 
마블 가재 탄생의 미스터리
 
최근 이 가재를 연구해 온 독일 암 연구 센터의 프랑크 뤼코(Frank Lyko) 박사는 독일 호수에 서식하는 마블 가재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모은 15가지 마블 가재 유전체를 서열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아무도 이 가재가 어디서 왔는지 유전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뤼코 박사 연구진은 마블 가재의 계통적 기원은 플로리다와 조지아에 서식하는 한 갑각류 종(프로캄바루스 팔락스 종)으로 추정했다. 또 홀로 번식하는 전 세계 마블 가재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해보니 큰 차이가 나지 않아 우연히 자기복제 능력이 진화한 단 한 마리 공통조상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성생식하는 종에서 단성생식하는 생물이 나온 걸까? 여기서 마블 가재의 수수께끼가 드러난다. 흔히 유성생식은 난자와 정자 각각의 성염색체 1개가 만나 2개의 성염색체를 가진 개체, 2배체를 이룬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블 가재의 성염색체는 3개이다.
 
과학자들은 이들이 3개의 성염색체를 가진 개체, 3배체라는 사실이 단성생식 능력을 얻은 시기와 관련 있다고 추측한다. 어느 시기에 마블 가재의 조상에서 돌연변이가 생겼다. 이 2개의 성염색체를 가진 돌연변이 가재의 성세포는 정상 가재의 성세포와 결합해 3배체 생물을 낳았다. 돌연변이 성세포가 난자였는지 정자였는지는 모른다. 새롭게 등장한 3배체 가재가 기형을 겪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건 분명하다.
 
이렇게 생겨난 암컷 마블 가재는 수정 없이 자신의 알을 배아로 유도한다. 감수 분열이 억제된 난자가 그저 어머니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배아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수정 단성생식(apomixis)으로 나온 자손은 당연히 동일한 염색체를 가진 암컷의 클론이다. 암컷 복제는 비율로 따지면 약 1만 개의 종 중 1개의 종에서 하는 매우 희귀한 번식 방법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신비로운 사건이 자연이 아니라 독일의 한 수족관에서 일어났다고 본다. 아마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다양한 종이 한데 모여 있던 특수한 상황에서 일종의 번식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종 분화를 목격하다
 
마블 가재의 수수께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화에서 단성생식은 유성생식에 비해 유전적 다양성이 빈약해 생존에 불리하다. 병원체라도 침입한다면 한꺼번에 몰살하기 쉽다. 그러나 마블 가재는 클론임에도 다양한 환경에 훌륭히 적응했다. 그렇기에 토착종을 위협하는 외래종으로 분류되기까지 한다. 이는 똑같이 3배체이며 무성생식하는 선충처럼, 마블 가재가 이미 유전적 다양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유일한 단성생식 갑각류도 아니며, 식물이나 일부 동물에서는 이미 흔한 다배수체임에도 마블 가재가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다. 바로 종 분화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마블 가재의 원래 종인 수컷 가재가 정자를 뿌려도 어머니의 클론만 나올 뿐 절대 수정이 되지 않는다. 이미 원래 종과 완전히 다른 종이 된 것. 이에 마블 가재는 ‘프로캄바루스 팔락스 포르마 비르기날리스(Procambarus fallax forma virginalis)’라는 독립된 학명까지 얻었다. 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성공적으로 생존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마블 가재의 맛은 과연 어떨까? 마다가스카르 지역에서는 식용으로 쓰지만 아쉽게도 그 맛은 다른 종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참, 그러면 키우고 있는 마블 가재가 속수무책으로 불어나고 있다는 처음의 질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번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분양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유럽연합과 일부 미주에서 판매를 금지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부터 위해우려종으로 지정해 반입을 금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글: 정유희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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