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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중 스님의 잊지못할 사형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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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운도, 무-유명시절 변함없이 대해줬다”
<박삼중 스님 대증언>가수 설운도에게 반한 사연
 
김성애 논설위원

1970년에서 1980년 후반까지 위문공연을 갈 때마다 많은 가수들과 코미디언들이 삼중스님을 따라다녔다. 물론 재소자들을 위한 잔칫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주인공들이었으니 박수갈채는 그들이 빚어 낸 몫이었다. 서울에 있는 교도소로에서 부터 저 남쪽 끝자락에 있는 소록도교도소까지도 동행은 이어졌다.

소록도 중앙병원에서 펼쳐진 무대에서 애간장을 녹이는 가락을 뿜어내는 가수 조용필은 너무나도 선한 미소를 띤 반쪽받이 손바닥 박수소리에 반하여 다짐을 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찾아뵈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삼중스님을 따라 왔지만 다음번에는 자진해서 다시 한 번 꼭 찾아오겠습니다.’ 이런 감동스런 이야기에서 영그러진 눈물바람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마음 바람을 두고 어찌 어느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던가.
 
가수 설운도, 마음에 있다
 
▲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화두로 자리 잡고 있는 '슈퍼스타k 2'에서 뜨거운 눈시울을 적신 가수 설운도 역시 그 옛날에 삼중스님을 따라  교도소 위문공연장을 누빈 주인공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갇힌 공간에서 잠시나마 나와 바깥 공기 속에서 듣는 흥겨운 노래자락은 세상에서 가슴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안이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2010년 9월 6일, 슈퍼스타k 2, 인천에서 열리는 3차 예선전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온 그는 응시자인 허각이 내뱉는 진솔한 사연에서 금세 달아올랐다.

"쌍둥이 형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헤어졌던 어머니를 만나 볼 수 있었으나 어머니는 이미 다른 분을 만나 새로운 가족이 있었어요. 그리웠던 어머니를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 가족을 위해 마음 편하게 연락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원망은 하지 않아요. 이해해요.”

“나도 고생을 해 봤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진실한 노래에는 사랑과 철학이 나오는 것 같아서 합격점을 주겠습니다."

자신이 겪어보았던 어려운 시절을 떠올리면서 응시자의 마음고생을 이해하는 눈시울을 화면 가득 담아 낸 가수 설운도였다. 그는 삼중스님 마음속에 늘 살아 있었다. 현철, 설운도, 현숙 등 이름을 날리는 대표적인 트로트 가수들은 교도소 위문공연에 따라다니면서 삼중스님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물론 트로트 가수들뿐만 아니라 이름 난 가수들 대부분들도 교도소 위문공연장에서 자주 얼굴을 내비추었다. 설운도 역시 무명가수로서 공연장을 누비면서 다녔던 시절이었으니 그의 결혼식장에 삼중스님은 얼굴을 내비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 정도로 유명 가수로 변해버렸다. 뭔가 달라졌다. 유명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그리 만들어 버렸다. 일정을 조율하는 매니저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하는 하루 24시간, 잠 잘 시간이나 가족들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다녀야 하니 당연했다. 대다수 이름이 알려 진 유명가수들에게 삼중스님이 전화라도 넣으면 ‘나 지금 바쁘니 전화 하지 마세요.’ 혹은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교도소 위문공연을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거리에서 고개를 외로 꼬면서 태도를 달리했다.

유명한 명분이 자신인줄 알고 있다. 인간 아무개가 영원히 유명해 진 줄 아는데 유명한 사람은 잊히는 게 인생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유명세가 오래 간들 유명할 때 만난 인연이 아니라, 인간 아무개로 만나는 것뿐이었는데 착각을 해도 많이들 했다. 추한 군상들이라 제대로 된 예술을 하는 사람 짓을 잊어버린 듯 했다. 이런 와중에 딱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가수 설운도는 이름이 날리던 시절에도 삼중스님을 따라서 마산교도소에서 공연을 한 차례 했다. 1시간 내내 혼자서 구수한 정담을 나누면서 흥겨운 무대를 이끌었다. 사실상 매니저는 돈이 나오지 않는 행사이니 따라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게 합당한 조치였다. 그러나 설운도는 ‘하고 싶다’는 의지로 자진해서 시간을 내었다. 바탕이 인간적이었다. 이리 마음 쓰는 바쁜 사람에게 부담주기가 싫어서 삼중스님은 마산교도소 공연 후에는 다시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었다. 언젠 인가 삼중스님이 공항에서 일정에 맞추어서 서두르면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삼중스님! 스님!”

저 멀리에서 가수 설운도가 고함을 치면서 쫒아오고 있었다.

“삼중스님! 왜 요새는 연락을 통 안하시나요? 연락만 주시면 제가 어디든지 달려가겠습니다.”

말 한마디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아니 다른 유명 가수들은 옆에서 지나치더라도 아는 체하지 않거나 피하는 판인데.......’ 설운도는 실로 달랐다. 무명시절에 만났지만 이제는 어엿한 유명인으로 내세울 만 유명세를 멀리했다. 사람으로서 변함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인연을 이리 일관성 있게 대하니 삼중스님에게만 이리 대하지는 않을 게 뻔했다. 다시금 가수 설운도가 이름이 날리지 않는 잊힌 가수가 되었을 때는 서로 좋은 추억거리를 나눌 수 있는 인연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마음에 삼중스님은 가수 설운도에게 반해버렸다. 
 
‘이총’이 맺어준 작곡가 길옥윤
 
1992년 동경의 중심부, 아카사카 지역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부촌을 형성하고 있는 한 가운데에는 한국인들에게 편안한 쉼터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포교당 하나가 새로이 세워졌다. 일본에서 태어 난 조만길 제일교포는 삼중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포교당을 기증까지 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총’을 고국으로 송환하는 데, 일본 땅에서 가장 많은 경제적인 지원을 자청했던 후원자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2세로서 자신의 아픔이 있기에 삼중스님이 하는 일마다 도왔다. 삼중스님이 일본에 나타나기만 하면 모든 경제적인 후원에서는 앞장을 섰다. 그가 있었기에 ‘이총’ 송환을 중심으로 김희로와 김일 선수까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영혼사상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문화에서 삼중스님이 ‘이총’ 송환식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광경을 제일교포들은 영원히 잊지를 못했다.

교토시 히가시쿠의 교토박물관 옆에 위치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정면에는 ‘이총’이 존재했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전리품들을 묻은 무덤이 바로 ‘이총’이었다. 이총(耳塚 귀무덤)은 코무덤(鼻塚)이라고도 불리웠다. 조선인의 코와 귀를 현해탄을 건너 올 때 썩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졌다. 이런 코와 귀들은 무려 126,000여명이나 된다는 글귀는 버젓이 ‘이총’ 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역사서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 대부분에서는 코와 귀가 잘려진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증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총’ 위에 있는 석탑을 원혼들의 기를 짓누르고자 무덤위에 세웠다. 교토에서 가장 관광객을 끌어 모이는 히데요시 도요또미 산사 한 귀퉁이에다가 내팽개쳐 있는 초라한 ‘이총’에 담겨있는 사연에서는 제일교포들 모두에게는 수치심을 주었다. 400여년도 지난 옛 선조들의 귀무덤 앞에서 죄스러움을 가슴에 매달고 살았다. 삼중스님이 ‘이총’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히데요시를 신처럼 모신 신사를 보면서 참으로 놀랬습니다. 그 위력에 기가 죽었습니다.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 큰 반구형 무덤위에 석탑이 올려 있는 곳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래서 ‘왜놈들은 무덤 위에도 탑을 세우나?’는 궁금증으로 현판을 무심코 읽어보았습니다. 가슴이 수천 길의 낭떠러지로 쿵 떨어졌습니다. 이 무덤이 ‘이총(귀무덤)’이라니, 풍국신사 정면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초라한 ‘이총’을 확인하는 순간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잡초만 무성한 무덤이 우리 조상 126,000여명의 귀를 묻은 무덤은 먼 옛날이여서 존재하지 않는 듯 우리네 교과서에서만 적혀있던 역사를 보는 현장이었습니다. 제 머리에는 화덕 불을 뒤집어 쓴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쏟았습니다. 다리는 덜덜 떨리고 온몸이 무당 신들 듯이 떨렸습니다. 내가 무슨 애국자입니까? 애국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리 몸이 떨리는지 내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언제인가 일본에서 삼중스님은 한국에서 동행한 지인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일본어를 잘하는 지인은 일본 방문길에서는 제일교포들하고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한껏 발휘했다. 택시 안에서도 역시나 일본어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런데 택시 기사는 일본어로 떠들어대는 지인에게 황당한 제안을 느닷없이 한국말로 꺼내었다.

“당신에게 요금을 안 받을 테니 ‘이총’을 가보고나서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 땅에서 함부로 일본 말을 그리 떠들지 마시죠.”

한국 사람들이 일본어를 잘해 봤자 대번에 한국인이라는 것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가슴 깊이 수치심이 가득차 있는 제일교포 택시 기사는 황당스런 제안을 하면서 동시대에 살아가는 수치심에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러니 조만길 사장 역시 ‘이총’ 송환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삼중스님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아카사카에 있는 한국술집에 대접하고자 했다. 그 시절 ‘센데이 서울’에서 삼중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1년 간 연재한 덕택에 전국에서 삼중스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조만길 사장과 삼중스님이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술집마담들은 뛰쳐나와서는 마치 고국에서 부모를 맞아들이듯이 삼중스님을 반겼다. 더군다나 삼중스님 장삼자락에 흰 봉투들을 서너 개씩을 넣어주었다. 통이 큰 마담들은 크게는 3십만 엔에서 새끼마담들은 십만 엔을 넣은 봉투들을 쫒아 나오면서까지 찔러 넣어주었다. 이런 대접 속에서 무대에서 기타를 치고 있던 길옥윤 작곡가도 내려와서는 삼중스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니 일본에서 태어 난 조만길 사장이 이런 광경에 자지러지게 놀라는 표정에 마담들은 큰 웃음을 날렸다. 조만길 사장은 아카사카 부촌에 있는 가장 좋은 맨션을 두 달간 공사를 시키더니 포교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참 대단한 분이니, 포교당을 만들어서 삼중스님에게 드리면 저 통 큰 마담들이 다 몰려오겠구나.’ 그래서 만들어진 포교당에는 많은 한국여인들이 몰려들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길옥윤 작곡가는 사업이 부도가 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혼과 부도로 세간에서 떠드는 잡음 속에서 숨어든 곳이 아카사카 술집이었다. 술집 무대에서 기타를 치면서 한 동안을 지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을 함께 지냈던 여인은 삼중스님의 포교당을 드나들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 역시 여인을 따라서 포교당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었다. 그러니 자연히 포교당 주지인 삼중스님을 만나면서 어려운 마음들은 풀어내면서 위안을 받았다. 사업 부도로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처지에서 삼중스님이 교화하는 감옥소라는 화두에서 그는 더욱 존경심을 가졌을 것이다. 조그마한 한국 술집들이 300여개가 밀집되어 있는 아카사카 거리에서 기타를 치는 당대 최고의 그가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삼중스님은 인간적으로 도닥거렸다. 먹고 살아야 하는 타국 땅에서 삼중스님은 감옥에서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스님을 꼭 한 번 돕겠습니다.”

“아니 뭘 저를 도와요?”

절박한 상황에 있는 그는 어느 날 삼중스님에게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좋은 마음에서 하는 대화로 그냥 지나쳤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언젠가는 삼중스님의 이야기를 작곡하여 세상에 알리겠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뒤 세월이 얼마간 지나서 부산에서 일본 행 비행기를 타려하는 삼중스님은 그의 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치과의사였던 동생은 형이 암이 걸려서 병문안을 가는 길이라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도 일본 일정을 늦추면서 동생과 동행을 함께 했다. 최고의 작곡가로 살다가 끝자락에서 좋지 않은 그림자에 싸여있는 모양새에 늘 안쓰럽다는 마음에서 끼어든 동행 길이었다. 일본여자대학 병원에 들어서자 그는 머리를 삭발한 채 누워있었다. 동생을 먼저 알아보면서 ‘어’하는 인사를 하면서 누워있다가는 이내 벌떡 일어났다.

“제가 스님을 꼭 돕고 싶었는데, 이리 쓰러졌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침대에 누우라는 말을 뒤로 한 채 일어나 앉은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한마디가 삼중스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서 약속을 지키려는 태도는 감동을 물씬 자아냈다. 최고를 누렸던 명사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스님 부탁이 있는데요. 혹여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나시거든 제 이야기 좀 전해주세요.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좀 쉬시라는 말을 해주십시오.”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던 김 추기경을 걱정하는 사내였다. 지나가는 말일지언정 잘 마무리를 하는 태도는 오랫동안 진한 감동을 남겨놓았다. 그 뒤 일본에서 부산 병원으로 옮겨져 있는 그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있으니 그가 직접 삼중스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sbs에서 길옥윤 작곡가에 대한 특집프로그램을 생중계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그래서 그를 위한 마지막 공연장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대에서는 진귀한 인연들이 줄줄이 출현했다. 패티 김, 혜은이, 딸, 그리고 현재 처, 모든 이들이 그를 위한 무대에서 응원을 해주는 모습들을 온 국민은 지켜볼 수 있었다.

“뭐 그까짓 병을 못 이겨 가지고는 이리 휠체어에 앉아있나요?”

전 남편을 툭 치면서 건네는 가수 패티 김은 걸걸한 사내가 어린애 다루듯이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모습은 남달랐다. 옆에 있는 혜은이는 지고지순 울기만 했다. 삼중스님은 생의 종반에 만난 그를 잠깐 스치면서 만났지만 참 아름답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기독교인 두 여자 탤런트
 
기독교에 대한 화두에는 언제나 조심스러워하는 삼중스님은 두 여자 탤런트들을 기억했다. kbs에서 하는 2부작 특집에서 삼중스님은 자신이 직접 출연을 해서 만난 탤런트들이었다. 빨치산 대장이었던 나윤주에 대한 극본에서는 삼중스님은 스님 역할을 그대로 재현했다. 나윤주의 아내는 극중에서 대단한 역할이었다. 삼중스님은 아내 역할을 했던 아무개 탤런트와는 촬영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교도소 교화활동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삼중스님을 따라 교화활동에 따라 나섰다. 그래서 첫 방문지에서는 모범수들만 수감되어 있는 수원교도소를 찾아갔다. 그녀는 3백만 원을 수원교도소에 후원하여 재소자 방에 마이크 시설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2년경이었으니 3백만 원이면 대단히 큰 후원금이었다. 여러 스님들과 신도들이 준비 한 떡과 음료수를 운동장에 모인 재소자들에게 나누어 준 마당에서 강연을 시작했다. 삼중스님은 간단한 법문에 이어 그녀의 소개를 장황하게 하면서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공손한 인사를 하는 그녀는 이내 당당하게 외쳤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 오신 삼중스님과 다른 스님들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을 믿어야만.............”

정말 너무나도 심할 정도로 기독교 사상을 전파했다. 불교행사에 참석한 사람으로서 이리 떠들었다. 강연장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재소자와 교도관들은 삼중스님만을 쳐다볼 뿐 법문이고 나발이고 엉망진창을 만들어버렸다. 좋은 마음에서 함께 동행한 교화활동에서 이상하게 종교 이야기로 관계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많은 후원금을 전달하는 마음은 충분하지만 스님들보고 하나님 믿으라면서 호통을 치는 그녀 역시 독한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와는 인연이 연결되지 않았지만 아픈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종교들 떠나서 교화활동을 하는 모습을 바랬지만 그리 되지 않는 인연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같은 종교인이라도 다른 모습에 반한 여자 탤런트가 있었다. 종교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삼중스님 역시 소록도 교도소에 가면 대부분 기독교를 신봉하는 재소자들에게 힘을 넣어주었다. “사랑하는 하나님 열심히 믿으시면서 편안한 마음 가지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는 법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가득하기에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던가.
mbc 수사반장 ‘석녀’는 삼중스님이 감옥에서 만난 여자 재소자의 이야기를 극화한 내용이었다. 한 여인이 아이를 못 낳으니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게 하였으나, 질투심에 남편과 임신을 한 애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자신을 뒤돌아보니 임신을 한 불행한 여인 역할에는 김혜자 탤런트가 열언을 했다. 그녀는 정말 감성이 대단하여 최후 집행장 장면에서는 여자 사형수가 된듯한 모습에서는 정말 탄복을 자아냈다.

“스님! 정말 못 견디겠어요.”

그녀는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 인간의 모습으로 반할 정도였다. 그리 몰두하여 여러 번 재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그녀는 많이도 울었다. 그 뒤 인연이 이어져서 삼중스님의 행사에서도 출연을 하면서 좋은 관계가 이루어졌다. 기독교인이었지만 삼중스님과 만나면 절대로 종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좋은 일을 거두는 사람들로서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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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01 [22:04]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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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 논설위원> 경력.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제사무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전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은행 소비금융부서 총괄담당 전 인덕대학 전임교수 전 경인여자대학 전임교수 전 팬아시아캐피탈 관리 본부장 현 인터넷신문언론인 --저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한국 금융연수원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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