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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중 스님의 잊지못할 사형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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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명 특공대 경호받으며 32년만에 형무소 출소
삼중스님 증언/김희로 특공대 경호받으며 형무소나온 사연<제2탄>
 
김성애 논설위원

삼중스님은 할머니에게는 아들 소식이 제일 좋은 명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 소식을 들고 다시 한 번 할머니를 찾을 생각을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한 작전은 어설프게 세워졌다. 그래서 할머니의 사진을 한 40여장을 찍었다. 할머니는 불교신자였으나 그는 기독교신자였다. 우선 기독교 신자인 김희로를 만나기 위한 구실은 어머니의 사진을 내미는 방법을 택했다. 할머니의 사진은 어느 곳에서나 이야기를 건네는 명목을 만들어 주었다. 삼중스님이 알고 있는 지인들을 총동원하여 그와의 면회를 위해 뛰어 다녔다. 겨우 일본 법무성 허락을 얻어냈다.
 
어머니 사진보여줘 면회성사
 
“김희로는 구마도모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어요. 할머니가 있는 시즈오카와는 정 반대편으로 아주 멀었어요. 겨우 받아낸 면회에 혹시나 김희로가 응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메시지를 우선 넣었어요. ‘나는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온 사람이다. 불교를 믿으라고 온 스님이 아니다. 난 한국인으로 당신 어머니의 근황을 전하러 왔다.’는 전갈에 그가 나타났어요. 신체가 건강하고 큰 키에 그는 아주 잘 생겼어요. 초면에 말을 줄이고 우선 사진 40장을 꺼내 놓았어요. 할머니 사진을 끌어안은 채 처참하게 울더라고요. 사진을 통해서나마 자식과 어머니는 끌어안고 보고파서 울었어요.”

그 시절 김희로의 석방에 대한 희망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그의 구명운동이란 있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삼중스님은 할머니의 절규하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었다. 막연하나마 그의 석방에 대한 꿈만을 가질 뿐이었다. 젊은 삼중스님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나마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비행기 표 값을 겨우 얻어다 쓰는 형편이었다. 삼중스님은 할머니를 16번 만났다. 양로원에서 15번,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스님의 가슴에 묻었다. 할머니가 아들의 소식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양로원과 형무소를 들락거렸다.

“일본에서 한 번은 추석을 맞았어요. 한국에 있다면 주로 고아원이나 소년원을 다녀요. 생일상이나 명절 상을 차리는 대신 그 돈으로 봉사를 주로 다녔어요. 그런데 일본에서 추석을 맞으니, 퍼뜩 할머니의 양로원이 생각나더군요. 오스까(한국명: 조만길)의 도움으로 신주쿠에 자그마한 포교당이 있었어요. 그 절의 신도들은 한국인들, 특히 술집 아가씨들이 많았어요.
 
조만길은 술집 아가씨들에게 한국인 할머니가 있는 양로원 잔치에 함께 가자는 제안에, 무슨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아가씨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지원했어요. 새벽 2시 술장사를 마치고 곧장 대형차에 올라 잠을 잤어요. 아가씨들 30여명이 양로원에서 추석 아침상을 차리기 위해 출발했어요. 참 고마운 사람들이죠. 돈을 모아서 양로원 할머니들에게 줄 선물로 스웨터, 먹을거리를 장만했어요. 그 중 엑스오 마담, 김춘자 마담의 진두지휘는 군대의 대대장처럼 참 잘했어요. 이국땅에서 제일 불우한 사람들이 베푼 따뜻한 정을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들의 춤과 노래는 여느 프로 연예인들이 하는 잔치보다 흥을 더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노래와 춤은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김희로 어머니, 양로원의 할머니들, 직원들은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즐거워했다. 아가씨들은 그의 어머니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일본 할머니들 모두에게 준비한 선물을 드렸다. 할머니는 기가 살았다. 그날 할머니는 여왕마마가 되었다. ‘봐라! 나 때문에 한국인들이 이리 와서 잔치도 해고 선물도 주지 않느냐?’며 일본 할머니들에게 큰소리로 자랑했다. 그리고 스님에게 ‘어느 자식이 이리 해주겠습니까?’는 감사함을 표했다.
 
“조국 대한민국 품으로 갑니다“
 
“정말 양로원이 생긴 이래로 처음 있는 흥겨운 잔치라는 일본 사무장이 설명을 마치고 내게 마이크를 건네주었어요. 나 역시 흥이 겨워 흥분한 목소리로 ‘오늘 이 잔치는 누구 때문에 열린 줄 아십니까? 박득숙 할머니 때문에 저희가 이 양로원에 왔습니다. 박득숙 할머니는 한국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박득숙 할머니 덕분에 오늘 참 즐거웠습니다. 이 할머니의 아들이 형무소에 있습니다. 20년간이나 형무소에 갇혀 있습니다. 할머니는 쓰려져서 거동을 못합니다. 그러니 면회를 갈 수 없어서 보고픈 아들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입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할머니는 곧 이 양로원을 떠나실 겁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조국인 대한민국 품으로 갑니다. 제가 그때까지 아들을 대신하여 할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 하는 인사말에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치면서 응원해 주었어요. 그 장면이 가끔씩 스쳐 지나가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는 크게 고함을 쳤어요. ‘내 아들이 형무소에서 나오는 날 ‘만세’부르고 장구 치면서 우리는 고향에 간다.’는 반울음 소리에 모두가 할머니의 손과 등을 어루만져 주었어요.”

이 잔치 끝 마당에 아가씨들은 돈을 모았다. 이국땅에서 자신들의 웃음을 팔면서 번 쌈짓돈을 꺼내었다. 할머니에게 희망을 주고자 아름다운 모금은 주머니를 몽땅 털게 했다. 할머니 손에 3십만 엔을 쥐어주었다. ‘할머니, 이 돈으로 비행기 표 사서 아드님과 함께 꼭 조국으로 돌아가세요.’건네면서 아가씨들 모두 울면서 대형차에 올랐다.

“8~9년 사이에 할머니의 양로원을 15번이나 들락 거렸어요. 세월에 따라 할머니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어요. 결국에는 침상에서 누워서 ‘왜 내 아들은 안 데려 오냐?’는 말만 할 뿐 거동을 하지 못했어요. 나중에는 말도 못한 채 눈만 멀뚱멀뚱 뜨면서 우셨어요. 말문이 꽉 닫힌 할머니의 가냘픈 숨소리에도 일본 법무성을 무너뜨릴 방안을 찾지 못했어요. 그 시절 동경특파원이었던 전여옥이 할머니의 사연을 방송하였으나 모두가 아무런 힘이 없었어요. 그래도 서울역에서 백만인 서명 운동을 거행했어요. 서명서만 잔뜩 창고에 쌓일 뿐 일본 법무성은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어요.”

삼중스님은 재일교포 조만길의 소개로 하라겐자브 국회의장을 만났다. 그 시절 막강했던 국회의장은 스님을 법무대신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법무대신은 국회의장 앞에서 서 있는 자세를 하며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그 자리에서 스님은 10만 명 탄원서를 법무대신에게 건네주었다. 법무대신은 국회의장의 힘이나, 산더미 같은 10만 명의 탄원서가 있을지라도 아무런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여러 경로의 구명운동에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눈을 감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갔다.

“서울에서 소식을 전해 듣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입관식은 마쳤더라고요. 무슨 마음에선지 잘사는 아들들이 다시 재입관식을 하면서 내게 대접을 잘해 주었어요. 물론 김희로는 형무소에 있었죠. 김희로의 슬픔이 내게로 와 닿았는지 정말 많이 울었어요. 할머니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할머니 관 앞에서 약속을 다시 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오늘까지 어머니를 16번째 봅니다. 지금까지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머님 대신하여 아들 손을 잡고 조국의 품으로 꼭 데리고 가겠습니다.’ 할머니는 눈을 뜨고 돌아가셨어요. 못 잊는 아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일본 장례식은 참 대단했어요. 수백 마리의 비둘기를 날리고 하루 종일 성대하게 음식을 베풀더군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구명운동을 했어요.”
 
석방운동 도운 고마운 분들
 
구명운동의 실타래는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이 처음으로 풀어주었다. ‘스님, 제가 김희로의 석방운동을 좀 돕고 싶습니다. 일본 법무대신과는 좀 인연이 있습니다. 특별접견을 알아보겠습니다.’하는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정몽준 국회의원도 김희로에게 한국에서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정 장관의 주선으로 김희로와의 면회는 한 달에 한번 허락되었다. 면회실에서의 삼중스님과 김희로와의 대화 기록은 일본 법무성에 소상히 보고되고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대한 소식으로 김희로는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게 했어요. 벽에 머리를 들이박으면서 통곡을 하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어요. 김희로의 가슴에는 어머니만이 있었어요.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온 편지는 200통이 훨씬 넘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어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구명운동을 하느라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고민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 법무성은 김희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시기적으로 서로 맞아 떨어진 듯해요. 일본 법무성의 실세들이 나에게 점심 제안을 했어요.
 
식사 중에 최고 책임자인 과장이 법무성을 대변하는 진심어린 말을 하더군요. ‘고맙다. 우리 형무소에 갇혀 있는 죄수를 교화해서 심성이 많이 좋아졌다.’ 사실 일본에서는 무기수는 의례 10년이 넘으면 가석방을 합니다. 그런데 무기수 김희로는 30여년 넘게 형무소에 갇혀 있으니 사실 문제는 많았습니다.”

형무소 내에서 김희로의 존재는 시한폭탄 같았다. 그를 30여 년 넘도록 형무소에 잡아 놓았지만 금방이라도 폭발 가능한 문젯거리였다. 그렇다고 일본 땅에서 가석방을 해주면 야쿠자 조직의 보복을 피할 수 없으니 그에 대한 거취는 큰 고민거리였다. 이런 배후 사정으로 법무성은 그를 삼중스님에게 떠넘겼다. 삼중스님과의 밀담 거래는 은밀히 진행되었다.

“일본 법무성은 그의 가석방을 내세우며 조건들을 치밀하게 내걸었어요. 한국에서도 절대 일본에 대한 비난을 하지 마라. 한국 내에서 김희로의 생활은 어떤 대책이 있느냐? 그리고 김희로의 옥중 여인에 대한 내용 등 아주 세세한 내용까지 하나하나 차분하게 집어나갔어요. 무조건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어요. 참 전생의 연이 그리 엮게 했는지 제가 사서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저 단 하나, 할머니의 관 앞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 하였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그와 함께 일본 비행기를 타는 것에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나의 숙명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후회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다음 생에는 할머니와 저는 참 복된 인연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일본 법무성에 의해서 비밀리에 이루어진 그의 귀국일정은 치밀하였다. 삼중스님은 그 당시 자신은 마냥 좋아서 붕붕 떠서 다녔다고 한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자신의 허벅지를 여러 차례 꼬집어 보아가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순간 하늘에 있는 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에는 눈물이 저절로 줄줄 나왔다고 한다.

“40여명 특공대의 경호를 받으며 김희로는 32년 만에 형무소에서 나왔어요. 일본 땅을 밟지 않는 조건으로 형무소에서 나와 곧장 비행기에 오르게 했어요. 한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그에게 거의 싹싹 빌다시피 해서 비행기에 태웠어요. 할머니의 유골에 대한 사연도  많습니다. 다른 것을 다 양보하지만 어머니의 유골은 꼭 품에 안고 한국에 가겠다는 그를 설득하느라, 유골을 지키려는 동생들을 설득하느라, 정말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일을 제가 다 해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리 정성을 다했는지는 아무도 알아주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만은 믿어주실 겁니다. 할머니와의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짓을 했던 것입니다. 김희로 보다는 그의 어머니가 언제나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디 하늘에서도 아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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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7/18 [21:45]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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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 논설위원> 경력.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제사무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전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은행 소비금융부서 총괄담당 전 인덕대학 전임교수 전 경인여자대학 전임교수 전 팬아시아캐피탈 관리 본부장 현 인터넷신문언론인 --저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한국 금융연수원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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