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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이꼴만든 경찰관을 부처로보라”
박삼중 스님 대증언/사형수 최재만 구명 스토리
 
김성애 논설위원

죽음 눈앞 두고 토해낸 문장
 
변호사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피 묻은 잠바에서 나온 피가 최재만의 혈액형과 일치하지 않자, 이러한 내용을 경찰이 증거물로 제출하기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수사기관은 ‘최재만 등 3명이 범행 전 일과시간에 농협분소에 들러 사전답사’를 기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최재만을 보았다는 한 여직원의 진술이 그 후에 ‘잘 모르겠다’로,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고 한다. 더구나 다른 2명의 여직원은 수사당시 ‘범행 전 현장을 답사했던 일당 중에 최재만은 끼여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나 이런 진술이 수사기록에서 빠져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이 여직원들의 이야기 내용을 녹음하여 재심 증거물로 제출하였다고 한다.

“법이 사형을 확정해 놓으면 이미 죽여 놓은 거예요. 뒤집을 방법이 없어요. 증인들의 녹취 제출과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도 재심은 기각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항고를 결심했죠. 재판의 항고 주심이 고등법원 부장판사였는데 알아보니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어요. 그래서 친한 수녀님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죠. 수녀님을 앞세워 부장판사와도 만났어요. 사건의 기록만으로 재심을 하는 관행으로 그 부장판사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토록 최재만의 사건기록은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어요.”


▲ 삼중스님     ©브레이크뉴스
삼중스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재만은 집행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은 최재만이 보내 온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토해내는 문장은 그 어느 뛰어난 시인들보다도 절실하게 마음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면회할 때 최재만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해요. 매 번 고맙고 송구스러워 했어요. 나는 일주일 중간 쯤 꼭 편지를 받았어요. 아마 편지를 천통 이상은 받았을 겁니다. 항고심에서도 사형을 뒤집을 수 없는 상황에서 쓴 편지는 내 마음을 다시 감동시켰어요. ‘스님, 내가 사형수가 된 것은 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나니 그 원인 제공을 제가 했습니다. 부처님의 법 안에서는 그 죄도 큰 형벌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형장으로 가겠습니다. 가는데 어린 두 자식에게 이런 슬픔을 두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스님이 한 번 만나 주십시오. 스님이 여름방학 때 제 두 자식에게 몇 주 만이라도 하계수련을 가르쳐 주십시오. 애비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의 편지를 읽고 감동하여 그의 집에 찾아 갔어요.”

이러한 최재만의 편지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지금 회상해 보면 어쩌면 그 편지가 그를 살리게 하는 동기가 되지 않았냐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으로 삼중스님은 최재만의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도 자식을 생각하는 부정이 안쓰러워 안양에 있는 그의 집에 찾아 갔어요. 단칸, 오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4식구가 살고 있었어요. 그의 아내가 요구르트 배달을 하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사는 모습이 눈물겨웠어요.
 
노모는 아들 때문에 그리 울면서도 며느리 칭찬을 여려 차례 하더군요. 그의 아내는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가정을 따뜻하게 안고 살고 있었어요. 두 자식들이 곧 초등학교에 들어 갈 나이였어요. 이 가족을 내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 절에서 함께 살면서 애들을 학교에 보내자고 제안했죠.”

최재만의 편지 한 장이 그 가족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내가 털어 놓은 아픔이 스님과 가족을 한 지붕 밑에 살게 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스님을 방문할 때는 그리 가난하면서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최재만의 아내는 꼭 요구르트, 직접 짠 스웨터, 음식들을 들고 절에 왔었어요. 그 때 당시 남편한데 면회를 가면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울면서 왔다고 해요. ‘난 도리 없이 죽어야 하는 팔자이니, 넌 팔자를 고쳐라’는 최재만의 마지막 면회 때의 말을 듣고, 속앓이를 했다며, 울면서 속마음을 털어 놓더라고요.
 
그의 아내가 털어 놓은 고민으로 내가 그 가족을 껴안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들게 되었어요. ‘스님,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가족을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친정에서는 애들을 스님에게 맡기고 재혼하라고 합니다. 스님이 애들을 받아주시기만 하면 애들 교육은 저보다 스님이 더 잘 해주실 거라 여겨집니다’ 이런 내용의 상의를 했어요. 그의 아내는 참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의 아내에게 말했어요. ‘애들을 떼어 놓고 재혼을 한다한들 보살님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보살님 심성은 참 착하다. 애들 둘이나 절에 맡겨 놓고, 좋은 남자를 만난다고 가정해도 보살님은 행복해지겠느냐? 억울하게 죽은 남편과 애 둘 때문에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 내는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내가 주지로 있는 절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남편을 기다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사형수 가족 절에서 살게하다
 
삼중스님의 절에서 두 자식에게 몇 주간의 하계수련을 소망했던 아버지의 한이 14년간을 함께 살게 만들었다고 한다. 스님이 머문 작은 절에서 최재만의 가족과 스님은 한 식구가 되어 살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아내는 공양주가 되여, 80만 원의 월급으로 자식들을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14년간을 같이 생활하다 보니 내 가족이 되었어요. 나에게 더 힘든 일이 많아졌죠. 80순 노인네는 내가 밖에 나가려고 준비하면 다리를 붙들고 울어요. ‘스님, 들어오실 때는 꼭 우리 아들 살려서 데려오세요. 우리는 스님만 믿고 있습니다’ 나를 꼼짝 못하도록 그 가족들에게 묻혀버린 셈이죠. 그들이 내 가족이 되었으니, 최재만의 구명운동은 내 일로 되어버렸어요. 사방팔방으로 구명운동을 했어요.
 
조선일보 김창수 기자, 이 기자는 의협심이 아주 뛰어 났어요. 조선일보에서 기사를 터뜨려주니 연합, 주간지, 일본신문까지 크게 기사를 다뤘어요. 그 당시 사형 집행이 막 할 시기였어요. 이리 언론에서 떠들면서 최재만의 집행 시기를 늦추기 위한 소치였지만, 떠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한번은 최재만의 범죄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부산에서 일어났어요. 그래서 부산까지 ?아갔죠. 최재만의 사건과 수법이 비슷하니 잡힌 범인들을 추궁해 달라며 담당검사에게 요청했어요. 그 검사가 웃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아 다녔어요.”

삼중 스님은 배명인 장관과의 인연이 최재만의 생명을 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스님은 배명인 장관에게 최재만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많은 은덕을 입었다고 한다. 배 장관이 법무부 장관직을 물러난 후에 삼중 스님에게 전화 한통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집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데 그 방법을 알고자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였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배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스님은 최재만의 사건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배 장관은 독실한 불자입니다.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사람이니 최재만 사건이 문제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단지 최재만의 불심을 칭찬하면서 참사람으로 살고 있다니 제가 한 번 알아보겠다는 말만 했어요. 나는 최재만의 편지만 받으면 모아 두었다가, 열흘에 한 번꼴로 배 장관에게 들고 갔어요. 배장관이 편지를 읽으면서 ‘제가 최재만과 인연이 많았군요. 제가 법무부 장관 시절에는 사형 집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전두환 대통령 아들의 혼사가 있을 시기였죠. 불자로서 경사스러운 시기에는 집행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사형이 집행되었더라면, 3년째 수감생활로 접어든 최재만은 아마 형 집행을 받았을 겁니다. 살 사람은 삽니다. 제가 신경을 쓰겠습니다’ 매번 무작정 편지를 가져다주어도 배 장관은 참 좋으신 분이예요. 그리 바쁜 분이 한 번도 이 편지들은 왜 가져오십니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다 읽고 난 후 ‘참 억울하네요. 편지가 참 감동스럽습니다’하며 은혜로운 말을 했어요.”

삼중 스님은 최재만의 편지를 받으면, 꼭 구상 시인과 종장 스님에게도 읽게 했다고 한다. 다들 최재만의 편지를 읽고나면, 녹아 떨어졌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언제 어디서나 최재만의 편지는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구명운동을 시작한 1년이 지난 여름철, 큰 수해로 수재민들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수해 의연금을 모금하면서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도 명동에서 가두모금을 하여 수해 의연금을 중앙일보 이은윤 기자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 때 삼중 스님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했다고 한다.

“그 기자는 성격이 참 시원했어요. 예전에도 최재만의 편지를 기사로 크게 다뤄주었던 기자였죠. 모인 수해 의연금을 건네주면서, 따로 최재만 이름으로 수해 의연금, 오만 원을 기부했어요. 기자는 최재만 기사를 따로 쓰겠다고 했죠. 내가 최재만 이름으로 수해 의연금을 낸 이유는 매달 영치금으로 오만 원을 넣어 주고 있었어요.
 
 며칠 전 최재만의 편지에서 큰 장마로 많은 수재민을 걱정하며 지장보살에게 빌고 빈다는 내용이었어요. 자신도 서럽고 수재민도 불쌍해서 편지에는 눈물 자국이 더러 있었어요. 그의 편지 내용에서 나는 자신의 영치금을 수해 의연금으로 낼 거라는 계산을 했던 거죠. 사회면 기사는 전국을 다 뒤흔들어 놓았어요.
 
감방에 있는 사형수가 수해 의연금 오 만원을 냈다는 기사 하나로, 결국 최재만이 살아나는 단초가 되었어요. 그 기사로 인해 법무부에서는 진상 조사까지 했어요. 어떻게 수감되어 있는 사형수가 수해 의연금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어요.”
 

▲ 삼중스님     ©브레이크뉴스

사형수가 낸 수해의연금
 
삼중 스님은 진상 조사에서 자신이 매달 넣어 주는 영치금으로 최재만의 수해 의연금을 대신 기부한 사실을 실토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어 본 배 장관은 ‘이런 착한 사람은 살려야 한다! 는 생각으로 후배인 법무부 장관을 찾아 갔다고 한다.

“현직에 있는 정 장관은 법무부 장관이 되기 전에 법무부 연수원장을 지낸 분이었어요. 법무부 연수원장 시절 내가 최재만 이야기를 이미 털어 놓았었죠. 그 당시 약속한바 있었어요. ‘스님, 저는 사형수와 연관된 부서에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전근하게 되면 기억하겠습니다’ 그리 기억하고 있는데 전임자 배 장관이 정 장관실에 찾아 간 거예요. 최재만 이야기를 앞에 꺼내 놓고 도와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대요. 배 장관은 그 시절 변호사로 개업을 막 했어요. 나오는 길에 자신의 부하로 있었던 차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네요.
 
또 김윤후 검찰국장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니, ‘선배님, 이 사건을 수임했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증거물을 보겠습니다. 선배님이 그리 억울하다고 하니 제가 챙겨 보겠습니다’했다고 해요. 배 장관이 법무부를 순례하고 나온 후, 나에게 ‘스님, 이제는 제가 최재만을 만나러 갈 시간입니다’ 배 장관, 참 존경스런 분이예요.”

삼중 스님은 배 장관과 함께 최재만을 면회하러 갔다고 한다. 역시 편안한 얼굴에 미소를 띤 최재만은 의외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고 한다.

“예고 없이 찾아 온 배 장관을 본 최재만이 ‘오늘 장관님이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어요. 배 장관이 ‘내가 장관인지 어찌 아느냐?’ 했더니 ”법무부 잡지에서 현직에 계실 때의 사진으로 뵌 적이 있습니다. 어제 밤 꿈에서 관세보살님이 내일은 너를 도울 장관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최재만은 수감생활을 참 모범적으로 했어요.
 
 108번을 5년~6년째 계속 하고 있었고, 그의 말에는 진실한 마음이 우러나왔어요. 배 장관이 ’자네는 딴 사람이 되어있구나. 여기 들어온 동기에는 관심이 없다. 자네를 만나서 참 기쁘다. 좋은 기분이다’라며 최재만을 양아들로 삼았어요.”

배 장관은 최재만을 앞에 두고 법문을 했다고 한다. 삼중스님은 배 장관의 법문은 유마거사의 법문에서 감명을 받은 것 이상 더 감명 깊은 법문이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배 장관만이 저런 법문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아주 편안하게 조용히 상대를 압도했다고 한다. 한충 더 고개 숙인 최재만은 법문을 들으면서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나는 이 중국고사를 가끔 써먹는다네. 유명한 스님 한 분은 왕과 아주 절친했네. 왕은 스님을 존경하였지. 왕은 스님을 국사로 모시면서 국사라는 직위를 떠나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다네. 어느 날 왕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스님이 왕의 접견실에 들어왔다네. 스님은 그 정도로 왕과 가까워서 왕의 접견실까지 무상출입하고 있었다네. 그 때 왕은 상대방의 바둑에 형세가 몰리는 상황 이었다네. 왕은 자신이 존경하는 스님이 방문하였으니, 빨리 바둑을 끝내려고 했다네. 그래서 큰소리로 ‘죽여 버려!’ 하며 바둑의 끝마무리 훈수 말을 했다네. 바둑
 
을 빨리 끝낸 몇 분 후, 방안을 훑어보니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네. 왕이 부하에게 ‘스님은 어디 가셨나?’하고 물어보니 ‘죽여 버렸습니다’하는 부하의 엉뚱한 대답에 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네. ‘무슨 소리냐?’하고 되물어보니 부하는 왕의 명령을 집행했다고 하네. ‘그 스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스님이 막 문으로 들어오실 때 ‘죽여 버려!’하는 명령을 받고, 바로 가서 왕명을 집행해 버렸! 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죽으시면서 꼭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윤회사상을 믿는 사람들만이 이해가 가능하다네. 스님이 떠나시면서, ‘내가 오늘 죽는 것은 전생에 왕과 나하고는 악연이 있었네. 죽는 마당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왕이 나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네. 왕에게 다음 생에는 빚 없이 만나자고 하게나. 나는 10생전에 땔나무꾼이었네. 어느 날 나무 밑을 쳐내는데, 낫으로 땅을 쳐 올리다가 지렁이가 끌려 올라왔네. 얼떨결에 지렁이를 토막 내서 죽였다네. 그 10생 전 지렁이가 10생후에는 왕이 되었다네. 그 10생 전 땔나무꾼인
 
나는 지렁이인 왕을 무심히 죽인 것이네. 살생하려 죽인 게 아닌데, 나무와 같이 벼낸 것뿐이라네. 왕이 무심히 ‘죽여 버려!’한 말이 나를 사형장에서 죽게 만든 꼴과 같다네’ 최재만 자네가 사형을 받은 이유를 원망하지 말게나. 전생의 악연이 있어서 불자로서 전생에 빚 갚는다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나. 아주 사형수에게 맞는 법문일세. 억울하고 분할게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네. 자네가 웃으면서 잘 수행하고 있는 모습에 자신감으로 한 법문이네. 자네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걸세! . 전생에 쌓은 빚 갚고 후생에서 멋지게 태어나게나. 이 고사를 잘 이해해? ? 웃으면서 떠나가게나.”
 
서옹 종정도 최재만에 법문
 
최재만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삼중 스님은 이야기한다. 배 장관뿐만 아니라 조계종에서 생불처럼 받드는 서옹 종정스님도 최재만에게 법문을 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서옹 정종스님에게 내가 자주 참견을 할 시기였어요. 종종스님께 사형수 이야기를 해드렸죠. 최재만의 구명운동을 위하여 제가 종정스님을 모시고 최재만을 만나러 갔어요. 노장스님은 참 천진하시고 너그러운 분이셨어요. 한국 불교의 상징이셨죠. 교도소 시멘트 바닥에서 삼배 절을 올린 최재만에게 그가 고통 받고 있는 점을 종정스님께 여쭈어 보라고 했죠. ‘가슴의 한을 피로 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증오심을 가슴에서 밀어내려고, 이 꼴로 만든 장본인 경찰관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6년 동안, 이 시간에도 나를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세운 그 경찰관은 용서할 수 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 법으로 용서할 수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종정스님의 답은 청천병력이었어요.
 
‘너를 이 꼴로 만든 경찰관을 부처로 봐라’ 단 한마디의 법문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최재만에게 내가 풀이를 해 주었죠. 모든 생명을 다 부처로 보아라. 부처를 미워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면 뭐가 부처야? 그 경찰관! 의 본래 마음, 생명의 근본, 그 자리는 곧 부처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본래 부처이다.
 
모든 이들이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중생은 무명억장이 가려져 있어서 어둠이 덮여 있는 그늘이 내 청정을 가리고 있어서 중생이다. 이 구름장이 거치면 부처가 되느니라. 이런 불교의 논리에서 보면 그 경찰도 부처이다.’ 내가 보충 설명을 하니 최재만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종정스님은 가만히 웃고 앉아 있었죠. 최재만은 종정스님에게 참 스님으로 받든다는 뜻으로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구상 시인은 정식으로 최재만의 ‘양아버지’였죠. 진정으로 친아버지처럼 최재만을 사랑하셨어요. 4명의 양아버지 모두 진심으로 사랑을 받은 최재만은 참 복 많은 사람이었어요. 배 장관으로부터는 법을 움직이는 힘, 가장 따뜻한 사랑은 구상 시인, 나는 일선에서 뛰어다니는 사람, 그리고 살아 계신 부처이신 종정스님까지 가장 훌륭한 아버지들이 불쌍한 한 자식을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어요.”

최재만의 구명운동은 스님뿐만 아니라 배 장관, 구상 시인도 적극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이 신문지상에 계속해서 기사화되면서 또 다른 곳에서는 아픔이 곪아 터졌다고 한다. 신문 지상에서 잊을만하면 또 뼈저린 아픈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피해자 가족들이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참지 못하여 스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비참하게 살해된 사람을 두고 어떻게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느냐? 재판부는 뭐고 경찰이 다 증인들을 세워 결론을 내린 사건인데 우리를 왜 여러 번 죽이느냐? 그 사건을 잊고 살려는 우리 심정을 스님은 아느냐?’고 하는 논리에는 스님도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유가족 심정 역시 잊히지 않는 아픔으로 그 가족도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가족에게 다시는 언론에 기사화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겨우 달래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조선일보에서 최재만의 억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냈다고 한다. 이번에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악에 바쳐 스님을 죽이겠다는 심정으로 찾아 왔다고 한다. 칼 맞아 죽은 자신의 아들 사진을 스님에게 던지면서, ‘내 자식을 죽인 놈을 살리겠다고 하는 스님부터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노인의 절규하는 모습에 스님도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죄송한 마음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빌었다고 한다. 절에서 함께 기거하는 공양주인 최재만의 아내가 이러한 광경을 다 지켜보는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는가? 비극적인 두 가족들의 아픔으로 스님 자신도 가슴이 메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은 배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첫 마디가 ‘스님, 살았습니다.’ 법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스님, 살았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최재만의 노모와 아내를 양 손에 하나 씩 끌어안고 너무 기뻐서 뒹굴었어요. 노모의 통곡하는 모습, 잊지 못합니다. 그 할머니를 모시고 개선장군처럼 면회를 갔어요.
 
교도소 문 앞에서 내 자신이 살아 난 것처럼 개선장군처럼 들어갔어요. 교도소 과장실로 딱 들어갔는데, 과장도 울었어요. ‘스님, 고맙습니다. 애쓰셨습니다’하며 기독교도인 과장까지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그 때 과장실로 전화가 울렸어요. 전화를 받던 과장이 쌍이 노래지더니 ‘스님, 큰일 났습니다.
 
최재만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게 아니라 사형으로 그대로 있습니다. 오보입니다. 지금 보안과장의 전화인데, 법무부 명단에는 최재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고 합니다. 최재만은 그대로 사형수입니다. 어머님에게는 최재만의 면회가 안되겠습니다.’하는 말에 내 얼굴도 노랗게 변했어요. 그 옆에 있는 노모는 죽을 듯이 통곡을 하고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한 날이었어요.”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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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4/04 [19:24]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대전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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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 논설위원> 경력.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제사무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경희대학교 국제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전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은행 소비금융부서 총괄담당 전 인덕대학 전임교수 전 경인여자대학 전임교수 전 팬아시아캐피탈 관리 본부장 현 인터넷신문언론인 --저서 현대비서 실무 영어 전화응대(한국 금융연수원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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