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증서

수필가 박종희 | 기사입력 2009/11/25 [20:32]

보험증서

수필가 박종희 | 입력 : 2009/11/25 [20:32]
“우리 보험 들어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정리 좀 해놔 봐”라고 하는 남편의 느닷없는 말에 신경이 쓰이는 아침이다. 평소엔 무관심하던 사람이 갑자기 보험에 신경을 쓰느냐고 하니, 도대체 어떤 종류의 보험인지 보상약관은 어떻게 되는지, 살면서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한다.

보험에 가입한 지 오래되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던 남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지, 어디가 아픈가. 남자 나이 마흔 넘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사고가 잦아지는 나이라던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한 마디에 아침부터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고 보니 남편의 얼굴이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진 것도 같다. 며칠 사이에 소화력이 떨어지고 체중도 자꾸 준다며, 병원에서 초음파도 찍고 약을 타 가지고 오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날 밤 서랍을 뒤져 보험 증권과 약관 등을 챙겨 아예, 한눈에 알 수 있게 보험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남편의 암 보험과 내 암 보험, 딸애의 상해보험, 그리고 운전자 보험, 교통안전 보험과 장학보험, 부모님들의 119 안전보험 등. 서랍 속에는 내가 가입하고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보험 증권들이 가득했다.

은행에 근무했었던 나는 보험엔 관심이 없었다. 고정관념 때문인지 보험은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생각부터 들었다. 은행의 적금과는 달리 중도해약을 하게 되면, 원금도 돌려받지 못하는 보험의 규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몇 년 동안은 보험설계사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기억에도 없던 동창생이나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해오면 대부분이 보험 가입서를 가지고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딸애의 출생연도까지 알고 딸애의 교육보험과 남편의 암보험까지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하던 동창도 있었다. 그러나 차 한 잔만 대접하고 섭섭하게 돌려보내던 내가 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자주 드나들면서이다.

병원에 가면 핑계 없는 환자가 없다.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 몇 년째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 환자, 특히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암세포와 싸우는 젊은 여자가 호스피스들의 간호를 받는 모습을 볼 땐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 중에 보험이 있어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누워있는 환자들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병원비가 없어 쩔쩔매며 이중고를 겪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완치될 수 없는 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죽게 되는 사람이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면, 남은 가족들이라도 따뜻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교통보험, 암 보험, 장학보험 등을 남편의 동의 없이 가입했고, 그렇게 가입해 놓은 보험들이 벌써 10여 년이 가까워진다. 처음에 보험 증권을 받아 들고 슬쩍 귀띔을 했을 때는 펄펄 뛰며 보험을 왜 드느냐고 했지만, 주위사람들의 사고와 죽음을 접하면서 남편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월급쟁이가 매월 내야 하는 장기적인 보험료가 당장은 부담이 되고, 나중에도 병이나 사고 없이 살다 간다면, 내가 낸 보험료를 손해 볼 수 있는 것이 보험이다. 적금과는 달라 예기치 못한 일로 중도에 해약하게 되면, 어이없는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는 동안 내 생명을  담보해주는 보험으로 안전하게 사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꼭 보상금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내가 진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고, 덜 슬프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좋은 일일 것 같다.

남편의 제안으로 서랍에 흩어져 있던 보험증서를 한곳에 모았다. 개중에는 보험료를 모두 내고 보장 혜택만 받으면 되는 보험도 있었다.

메모지에 꼼꼼하게 가입일과 만기일, 적용약관까지 적어서 가족이 모두 아는 장소에 놓아두었다. 낸 보험료 전부를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이라도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장성이 높은 보험이라 한들 남편만 한 보험이 어디 있겠는가.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보험 증서를 찾았던 남편이 정작,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119보험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려는지 모르겠다.

15년 전 내가 든 ‘남편’이라는 보험은 금리가 변동되어도 걱정 없고, 따로 정해진 만기일도 없어 좋다. 가입 조건은 다소 까다로웠지만, 특별 배당금으로 딸아이까지 받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보험이 어디 있으랴. 이제껏 내가 가입한 그 어떤 보험보다도 당신이 우리 집에 가장 튼튼한 보험이라는 말을 하면 남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검사결과, 다행스럽게도 스트레스로 오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했다.
 
우리 집 주치의인 친구가 의사로 있는 병원에서 한 달 치 약을 처방받아 오던 그날 밤, 파일에 간략하게 만들어 놓은 보험증서를 들여다보던 남편은 다른 날보다 더 편안하게 잠을 청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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