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보는 세상 읽기(62) - 무왕의 천하 대업

이응국 | 기사입력 2008/03/10 [13:49]

주역으로보는 세상 읽기(62) - 무왕의 천하 대업

이응국 | 입력 : 2008/03/10 [13:49]
 
*무왕의 천하 대업

  문왕이 천명을 받은 지 7년이 지나서 작고하고, 뒤를 이어 武王이 즉위하였다.『예기』문왕세자에 의하면, 문왕이 무왕에게 말하기를 “너는 무슨 꿈을 꾸었느냐?” 무왕이 답하기를 “꿈에 천제께서 저에게 구령(九齡)을 주셨습니다” “너는 그것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서방에 아홉 나라가 있으니 군왕께서 마침내 진무(鎭撫)하실 듯합니다” “아니다. 옛날에는 나이를 령(齡)이라 말했으니 이(齒)도 또한 령(齡)이다. 내 수명은 100세이고 네 수명은 90세니 내가 너에게 세 살을 주겠다” 하였다. 문왕은 97세에 임종하고 무왕은 93세에 임종한 것이다. 이 말에 근거한다면 무왕은 수명을 3년 더 연장했으므로 주나라를 세우게 된 셈이다. 그는 강태공(姜太公)을 군사로 삼고, 주공단(周公旦)을 천자를 보좌하는 직책에 임명하였으며, 소공(召公)과 필공(畢公) 등을 왕의 곁에 두고 정사를 보좌하게 하여 문왕의 대사업을 일으켜 더욱 빛나게 하였다.

  문왕 9년에 무왕은 필(畢) 땅에서 문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필땅은 문왕의 묘가 있는 곳이다. 아마도 이때는 3년 상인 대상을 마치고 난 뒤였을 것이다. 무왕은 문왕에게 제사를 올리고 난 뒤 동쪽으로 가서 군사를 검열하고(觀兵)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은나라를 치기 위해서이다. 무왕은 문왕의 위패를 새겨 수레에 싣고, 자신을 스스로 ‘태자발(太子發)’이라 칭하였다. 문왕이 죽은 후였지만 부친인 문왕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며 스스로를 ‘태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은 문왕의 명을 받들어 토벌하려는 것이지 감히 독단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무왕이 맹진(盟津)에서 배를 타고 건너던 도중 커다란 흰 물고기(白魚)가 무왕이 타고 있는 배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무왕은 머리 숙여 그 물고기를 주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강을 다 건넜을 때 하늘에서 불덩이가 내려오더니 무왕이 머무는 지붕에 다다르자 이내 까마귀로 변하였는데 그 색이 적색(赤色)이었으며 그 울음소리는 안정(安定)하였다. 이때 맹진에 모여든 800여 제후들이 주(紂)를 쳐야한다 했으나 무왕은 아직 천명이 아니라며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갔다.

  이러한 징조에 대해 한대(漢代)의 마융(馬融)이 말하기를 “물고기는 비늘이 달린 물(介鱗之物)이니 병(兵)을 상징하고 백색은 은나라의 정색(正色)이며, 왕의 배에 뛰어 들었다는 것은 은나라의 명(命)이 주(周)나라에 귀의한다는 징조다” 하였다. 또한 정현(鄭玄)은 말하기를 “까마귀는 효덕(孝德)이 있으니 무왕이 아비의 대업(大業)을 마친 고로 까마귀의 상서로운 기운이 모인 것이다. 적색은 주나라의 정색이다” 하였다. 그런데 왜 군사를 되돌렸을까? 이에 대해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이 같은 일은 한 터럭의 사이라 할지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루라도 천명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는 인군과 신하요 당일로 끊어졌으면 독부(獨夫)가 되는 것이니 어찌 관병(觀兵)한 뒤에 정벌하리요?”라고 설명하였듯이 무왕은 은나라 정벌에 대해 거듭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은나라 주왕이 더욱 포악무도해져 숙부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무왕은 맹진을 건너 제후들을 집결시켰다. 이때가 문왕 11년 12월 무오일(戊午日)이다. 이에 대한 사적이『서경』태서(泰誓)에 전한다. 다음 해(서기 전 1066년경) 2월 갑자일 상나라는 목야(牧野:하남성 淇縣)에서 대패하고 주왕은 녹대(鹿臺)에서 불 속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로써 주나라가 창건된 것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관한 고사(故事)는 이 당시에 나온 것이다. 백이․숙제는 형제지간으로 고죽군(孤竹君)의 두 왕자다. 부친이 셋째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부친이 죽자 숙제가 첫째인 백이에게 양위(讓位)하려 하자 백이는 “부친의 명(命)이다” 하고 도망가고, 숙제 역시 형이 있는데 자신이 왕위를 계승함은 천리를 어기는 일이라 하며 도망했다. 국인(國人)이 할수없이 둘째를 세웠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서백인 창(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의탁하기 위해서 주나라에 갔다. 그러나 이때 서백은 이미 죽었고, 무왕이 수레에 ‘문왕’이라 쓴 위패를 싣고서 동쪽으로 주(紂)를 치러 가던 중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붙잡고 간(諫)하기를 “아비가 죽어서 장사지내지 않았는데 군사를 일으키니 효(孝)라 말할 수 있는가? 은나라 신하로서 인군을 죽이려 하니(以臣弑君) 인(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좌우에서 이들을 베려 하자 태공(太公)이 “이 사람은 의인(義人)이다” 하면서 살려 주었다.

  무왕이 은나라의 난리를 평정하고 천하가 주(周)나라를 받들었지만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는 “의리에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義不食周粟)” 하며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전하기를 “무왕과 태공의 마음은 한시라도 인군이 없음을 두려워한 것이고, 백이․숙제의 마음은 만세를 전할 인군이 없음을 두려워한 것이니 이들의 의(義)는 병행하는 것이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굶어서 죽게 되었을 때 그가 지은 노래가 있다 하니 다음과 같다.




登彼西山兮(등피서산혜) 採其薇矣(채기미의)로다     

저 서산(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以暴易暴兮(이포역포혜) 不知其非矣(부지기비위)로다   

포악(무왕)으로 포악(주왕)을 바꾸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

神農虞夏忽焉沒兮(신농우하홀언몰혜)여 我安適歸矣(아안적귀의)오 

신농씨와 虞舜. 夏禹의 도가 홀연히 자취 없어졌으니 내가 어디에 의탁할꼬

于嗟徂兮(우차조혜)여 命之衰矣(명지쇠의)로구나    

아아! 가리라 명이 쇠해졌구나




  사마천은 이를 두고 “혹 말하기를 ‘천도가 친함이 없으나(天道無親) 항상 善人과 함께 한다(常與善人)’ 했는데 백이숙제 같은 이는 선인이라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인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했는데도(積仁潔行) 굶어서 죽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군자는 비록 죽더라도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법이라, 공자를 비롯해서 후세 사람들은 백이숙제를 청절지사(淸節之士)로 칭송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사마천도 그들을 『사기열전』의 첫 장에 기록하면서 충절을 기린 것이다.
▶ 필자는 대전광역시 유성문화원과 학회에서 주역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14:00~16:00 : 주역상경.(학회강의실)
매주 목요일 19:00~21:00 : 주역기초.(유성문화원)
매주 화요일 19:00~21:00 : 대학중용.(학회강의실)
※ 수강료 : 50,000원 /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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