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신상구 국학박사 | 기사입력 2023/12/09 [20:33]

<특별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신상구 국학박사 | 입력 : 2023/12/09 [20:33]

<특별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 신상구 국학박사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2023년 12월 8일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탄신 143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사학자, 언론인, 항일독립운동가, 문필가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는 위대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권희영(權熙英, 1956) 원장이 어느 공개 학술회의 현장에서 “신채호 선생은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입니다.”라고 막말을 해서 신채호 선생이 순간적으로 일시에 폄하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해 애국 시민들을 분노케 한 적이 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역사학자들이 분개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신채호 선생의 출생지인 대전과 성장지인 충북에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61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천고(遷固) 이덕일(李德一, 1961) 박사가 자기의 저서인『우리 안의 식민사학』(만권당, 2014.9)에서 “프랑스 같으면 당장 감옥에 갔을 이런 극우 파시스트 매국노”가 한국 역사학계 주류의 한 갈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대전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과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8년 동안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가 살았다.

 

  그는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申星雨)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세 때 행시(行時)를 지었으며,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18세 때 조부의 소개로 한말 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서재에 진열된 각종 서적을 읽어보고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다.

 

   19세 때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 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26세 때인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주필로 활동하며 <독사신론>과 <을지문덕> 등을 발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신민회에 참가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금연을 결행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11년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한국선도 관련 논문인「동국고대선교고」를 발표하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여 외래 종교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의해 말살된 민족혼을 되살리는 데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조사 연구하여『조선상고사』(1915),『조선상고문화사』(1910년대 후반),『조선사연구초』(1924) 등을 집필함으로써 근대민족사학을 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문학적 상상력과 문장력이 뛰어나 <꿈하늘>(1916), <용과 용의 대격전>(1928) 등과 같은 소설을 창작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단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晚, 1875-1965)의 ‘위임통치론’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단재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해 의열단원들의 이념과 투쟁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폭력독립운동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의 선언문을 기초하고,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는가 하면,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8년에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사건'으로 체포된 바 있고, 그 후 항일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또 체포되어 대련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에 56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뒤늦게나마 한국정부가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을 수여했고, 1978년과 1979년 사이에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위치한 묘역을 정화하고 이곳에 사당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1992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 복원해 놓은 기념물 제26호인 신채호 선생 생가가 2002년에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단재 생가 터는 지난 1992년 발굴조사와 고증 후 조성됐고 1996년 그 앞에 동상이 세워졌다.

 

  이어 2015년에는 생가 주변에 홍보관이 문을 열었고,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는 서대전시민공원에도 동상이 설립됐다.

 

                   2, 단재 신채호 선생 탄생 143주년 기념식 개최 현황 

 

  대전 중구청과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대전보훈청이 후원한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43주년 기념식이 2023년 12월 8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에서 지역 보훈단체, 시민·사회단체, 시민, 청소년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면서도 성대하고 풍성하게 개최되었다. 

이번 기념식은 그동안 대전과 청주에서 각각 진행되었던 탄신기념식이 통합하여 진행되는 두 번째 기념식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위대한 일생과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이번 기념식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을 축하하는 산성동풍물단의 식전공연과 DMC어린이합창단의 공연이 있었고, 헌사 ․ 축사 ․ 헌화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에서 개최된 탄신 143주년 기념식 사진(대전 중구문화원 제공)

  

  이번 기념식 행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을 통한 대전과 청주의 근대역사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의 뜻을 깊이 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승환 충북대 명예교수는 헌사에서 “일생을 민족해방에 바친 신채호 선생은 조선, 러시아, 일본, 중국을 오가면서 일체의 타협과 굴종을 거부하고 견결한 반제 항일 투쟁의 길을 걸었다. 또한 선생은 아득한 이국 땅 여순 감옥에서 장렬하게 옥사하는 그날까지 민족의 역사와 민족의 정신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선생의 유훈은 삼천리에 선연하고, 선생의 혼백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대한 민족의 하늘 북(天鼓)을 울린다.”고 힘주어 말했다.       

                      3.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의 문제점과 과제  

 

  단재 신채호 선생이 대전에서 태어났음에도 선양사업이 주로 충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어 안타깝다. 충청북도는 2009년에 신채호 선생을 '충북을 빛낸 역사인물'로 선정하고 단재문화예술제전, 단재 학술토론회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청주문화관 4층에 신채호기념관을 설치하고 단재의 일대기를 그린 영상은 물론 각종 서적과 사진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또한 단재교육연수원을 설립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43주년을 맞이하여 대전역 광장에 단재 동상을 세우고 대전역 광장을 ‘단재광장’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대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도심을 활성화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한다.

 

                                 <국학박사 신상구 약력>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출생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 경제학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 석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국학박사 2호

   .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민속학자, 칼럼니스트

   . 통일문학상, 전국 향토문화 논문공모 대상(국무총리상) 수상

   . 학술논문「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등 127편.

   . 대표 저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도서출판 근화, 2019)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를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Special Contribution> Event commemorating the life, achievements, and 143rd anniversary of Danjae Shin Chae-ho’s birth

 

                            1.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Danjae Shin Chae-ho

 

   December 8, 2023 is a very meaningful day as it marks the 143rd birthday of Danjae Shin Chae-ho (申采浩, 1880-1936).

 

   Danjae Shin Chae-ho is a great patriot who is widely revered as a national historian, journalist, anti-Japanese independence activist, and writer. However, recently, Dean Hee-young Kwon (權熙英, 1956) of the Graduate School of Korean Studies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 mainstream Korean historian, made a rude comment at a public academic conference, saying, “In four words, Professor Shin Chae-ho is a psychopath, and in three words, he is a scoundrel.” There was an outrageous incident in which a teacher was momentarily disparaged, enraging patriotic citizens. What is more surprising is that even after hearing those words, many historians present did not feel indignant and remained silent, and even those in Daejeon, Shin Chae-ho's birthplace, and North Chungcheong Province, where he grew up, showed no reaction.

 

   Among the misfortunes, fortunately, Dr. Lee Deok-il (1961), born in Asan, South Chungcheong Province, received a doctorate from the Department of History at the Graduate School of Soongsil University and is currently the director of the Hangaram Institute of History and Culture, published his book, “Colonies Within Us.” In History』(Mangwondang, September 2014), he lamented the reality that “such extreme right-wing fascist traitors who would have been imprisoned immediately in France” occupy a branch of the mainstream Korean historical academia.

        

   Danjae Shin Chae-ho was born on December 8, 1880, in Eonam-dong, Jung-gu, Daejeon, as the second son of Shin Gwang-sik and Miryang Park. He lived here for eight years and then moved to Gwirae-ri, Nangseong-myeon, Cheongwon-gun, Chungcheongbuk-do.

 

   He lost his father at the age of 7 and his older brother at the age of 15. At the private residence run by his grandfather, Shin Seong-woo, who served as Jeongeon (定言), he received training in Chinese classics from the age of six, composed Haengsi (行時) at the age of 10, and read the Three Classics at the age of 12 or 13. I heard the sound of a prodigy. At the age of 18, through the introduction of his grandfather, he entered the private residence of Yangwon Shin Gi-seon (申箕善, 1851-1909), who was a Confucian scholar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was the Minister of Education, and read various books displayed in the study to deepen his understanding of new studies.

 

    In the fall of 1898, when he was 19 years old, he entered Sungkyunkwan on the recommendation of Shin Ki-seon. There, he came into contact with some of the progressive Confucian trends led by Baekam Park Eun-sik (1859-1925), realized the limitations of Confucian studies, and developed a framework for feudal Confucianism. gradually developed a nationalistic worldview.

 

   In 1905, at the age of 26, he became a doctor at Sungkyunkwan, but gave up his government position and joined <Hwangseong Shinmun> and <Daehan Maeil Shinbo> as an editorial reporter, working as a chief editor and publishing books such as <Doksatheism> and <Euljimundeok>, while also supporting Japanese colonial rule. He harshly criticized the invasion and the treasonous acts of pro-Japanese factions and led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to restore national sovereignty. And he showed himself as a practical intellectual by participating in the People's Association, actively participating in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movement, and quitting smoking.

 

   In 1911, he went into exile in Vladivostok, Maritime Province, and provided national education for Korean youth in China. He published “Dongguk Ancient Mission High School,” a thesis on leading Korea, and risked his life to wage an armed struggle for independence, opposing foreign religions and religions. It contributed greatly to reviving the national spirit that had been destroyed by Japanese colonial rule. He researched and studied Goguryeo and Balhae relics scattered throughout Manchuria and the Maritime Province and wrote 『Joseon Sanggo History』 (1915), 『Joseon Sanggo Cultural History』 (late 1910s), and 『Joseon History Research Elementary』 (1924), etc., leading to modern national history. contributed greatly to establishing In addition, he had excellent literary imagination and writing skills, and created and published novels such as <Dream Sky> (1916) and <The Battle of Dragons and Dragons> (1928).

 

   Danjae participa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but left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opposition to President Woonam Rhee Syngman's (李承晚, 1875-1965) ‘mandate rule theory.’

 

   Danjae also wrote the Joseon Revolutionary Declaration and presented the ideology and struggle goals of the members of the Uiyeoldan. And he drafted the manifesto of 'Damuldan (多 勿團)', a violent independence movement group, joined the anarchist Eastern Federation, and also participated as a promoter of Shinganhoe.

 

   Then, in 1928, he was arrested for the 'Anarchist Eastern League International Counterfeit Case', and after that, while raising funds for the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he was arrested again and sentenced to 10 years in prison by the Dalian court, and was imprisoned in Lushun Prison until 56 in 1936. He died at the age of three.

 

   Although belatedly, the Korean government awarded him the Order of Merit for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62, and between 1978 and 1979, his gravesite located in Nangseong-myeon, Cheongwon-gun, Chungcheongbuk-do was purified and a shrine was erected there. And the birthplace of Shin Chae-ho, monument No. 26, restored in Eonam-dong, Jung-gu, Daejeon in 1992, was designated as a memorial facility in 2002. The site of Danjae's birthplace was created after excavation and research in 1992, and a statue was erected in front of it in 1996.

 

   Then, in 2015, a public relations center was opened near his birthplace, and in 2019,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 statue was installed at West Daejeon Citizen's Park.

 

                    2. Status of the ceremony commemorating the 143rd anniversary of the birth of Danjae Shin Chae-ho

 

   The ceremony commemorating the 143rd anniversary of Danjae Shin Chae-ho's birth, hosted by Daejeon Jung-gu Office and Danjae Shin Chae-ho Memorial Association and sponsored by Daejeon Veterans Affairs Office, will be held at Danjae Shin Chae-ho's birthplace in Dorimi Village, Eonam-dong, Jung-gu, Daejeon, from 10:30 a.m. to 12:00 p.m. on December 8, 2023. It was held solemnly, grandly, and richly with the attendance of about 150 people, including local veterans groups, civic and social groups, citizens, and youth.

This commemorative ceremony is the second commemoration held by combining the birthday ceremonies held separately in Daejeon and Cheongju.

 

   This commemorative ceremony commemorating the great life and noble spirit of Danjae Shin Chae-ho included a pre-ceremony performance by the Sanseong Dong Pungmul Troupe and a performance by the DMC Children's Choir to celebrate Danjae Shin Chae-ho's birth. Barn . There was time for offering flowers.

  

   This commemorative event was an opportunity to rediscover the modern history of Daejeon and Cheongju through Danjae Shin Chae-ho, and a good opportunity to deeply reflect on the independence spirit and love for country of Danjae Shin Chae-ho, the great teacher of our people.

   Kim Seung-hwan, professor emeritus at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and co-representative of the Danjae Shin Chae-ho Memorial Society, said in his tribute, “Shin Chae-ho, who devoted his life to national liberation, refused all compromise and submission while traveling between Joseon, Russia, Japan, and China and followed the path of a steadfast anti-imperialist and anti-Japanese struggle. I walked. “In addition, he lived for the history of the nation, the spirit of the nation, and the future of the nation until the day he died heroically in Yeosun Prison, a distant, foreign land,” he recalled. And he said emphatically, “Your legacy lives on for three thousand miles, and your soul beats the heavenly drum of the Korean people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3. Problems and challenges of Danjae Shin Chae-ho’s commemorative project

 

   It is unfortunate that even though Danjae Shin Chae-ho was born in Daejeon, the Shenyang project is being actively developed mainly in North Chungcheong Province. Chungcheongbuk-do selected Shin Chae-ho as a ‘historical figure who brought glory to Chungbuk’ in 2009 and is carrying out various commemorative projects such as the Danjae Culture and Arts Festival and the Danjae Academic Debate. In addition, the Shin Chae-ho Memorial Hall was established on the 4th floor of the Cheongju Cultural Center, Nammun-ro 2-ga, Sangdang-gu, Cheongju, and displays various books and photos as well as a video depicting Danjae's life. In addition, the Danjae Educational Training Center was established to inherit and develop the ideas and achievements of Danjae Shin Chae-ho.

   In commemoration of the 143rd anniversary of Danjae Shin Chae-ho's birth, I believe that erecting a Danjae statue at Daejeon Station Square and renaming Daejeon Station Square as ‘Danjae Square’ will be very helpful in establishing the identity of Daejeon and revitalizing the old downtown.

 

                                  <Biography of Doctor of Korean Studies Shin Sang-gu>

 

    . Born in 1950, 63 Samnak-ri, Cheongcheon-myeon, Goesan-gun, Chungcheongbuk-do

    . Baekbong Elementary School, Cheongcheon Middle School, Cheongju High School, Bachelor of Economics from Cheongju University, Master of Social Education from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2nd Doctorate in Korean Studies from International Brain Education Graduate University

    . Local historian, poet, literary critic, folklorist, columnist

    . Won the Unification Literary Award and the Grand Prize of the National Local Culture Paper Contest (Prime Minister's Award)

    . 127 academic papers, including “A Study on the Paper Cutting Craft of Shamans in the Taean Area”.

    . Representative book: 『An In-Depth Study of Korea’s Nobel Prize in Literature Award Conditions』 (Geunhwa Publishing,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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