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 보는 세상 읽기(60) - 문왕(文王)의 수난

이응국 | 기사입력 2008/02/25 [16:01]

주역으로 보는 세상 읽기(60) - 문왕(文王)의 수난

이응국 | 입력 : 2008/02/25 [16:01]
 
* 문왕(文王)의 수난



  고공단보 뒤에 계력이 즉위하여 인의(仁義)를 시행하니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후 계력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창(昌)이 즉위하였다. 문왕이 살던 시대를 中古時代라 하는데 이 때는 상고시대의 순박한 풍속에 비하여 世態는 변하고 風俗은 바뀌게 되었으며 은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엄청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과거 은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또한 역사는 승자에 의해 장식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은나라 말기 주(紂)왕이 과연 전해지는 바와 같은 폭군이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사료(史料)가 한정되어 있으니 이에 의존해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문왕을 서백(西伯)이라 하니 이는 주나라가 은나라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은왕 주(紂)가 문왕을 서방제후의 장(長)으로 명한 것이다. 주역에서 은(殷)나라는 동북(東北)방에 있고 주(周)나라는 서남(西南)방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기』주본기에는 ‘서백은 후직과 공유의 업(業)을 따르고 고공과 공계의 법(法)을 본받아 인을 독실히 하고(篤仁), 노인을 공경하고(敬老), 아랫사람을 사랑하고(慈少), 어진 자를 우대하고, 낮에도 밥을 먹을 겨를이 없이 선비들을 우대하였으니 선비들이 이 때문에 귀의하였다. 백이(伯夷) 숙제(叔齊)도 고죽국(孤竹國)에서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귀의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당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은 제신(帝辛)이었다. 그는 제을(帝乙)의 아들로서 이름은 수(受)요 시호(諡號)가 주(紂)다. 시법(諡法)에 의하면 ‘의를 해치고 선을 덜어내는 것을 주(殘義損善曰紂)라’ 하니, 주(紂)라는 호는 악행을 일삼는 자에게 내리는 시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주(紂)에게는 삼공(三公)이었던 주후(周侯:西伯)인 창(昌)과 구후(九侯), 악후(卾侯)가 있었다. 구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구후가 그 딸을 주(紂)에게 바쳤다. 구후의 딸이 음탕함을 싫어하자 이에 격분한 주는 그녀를 죽였으며, 아울러 구후에게는 해(醢)라는 끔찍한 형벌을 가해 죽였다. 이에 악후가 간언하자 그 역시 생선포를 뜨듯 육포(肉脯)를 떠서 죽여 버렸다고 한다. 창(昌)이 듣고서 탄식하자, 마침 서백의 어진 덕으로 민심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던 터라 숭후(崇侯)인 호(虎)가 은왕인 주(紂)에게 서백을 참소해서 말하기를 “서백이 적선(積善)누덕(累德)해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향하고 있으니 장차 제(帝)에게 불리합니다” 하였다. 주(紂)가 그 말을 듣고 유리옥에 서백을 가두게 된 것이다. 이 역시『사기』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리옥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탕음시(湯陰市) 북쪽 3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무왕이 주(周)나라를 세우고 서백을 문왕으로 추존하고, 유리옥의 구지(舊址)에 문왕묘(文王廟)를 건립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문왕묘를 참배하면서 그 옆에 ‘문왕연역대(文王演易臺)’와 ‘문왕팔괘비(文王八卦碑)’를 세워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다. 서백이 유리옥에 갇히게 된 보다 자세한 연유를 알 수는 없지만,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창의 아버지인 계력이 주왕(紂王)의 조부인 문정(文丁)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있으니, 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일들과 관련하여 서백이 유리옥에 갇히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주역은 바로 이 유리옥 속에서 저술되었다. 대개 성인(聖人)의 도(道)는 난세(亂世)에 드러나는 법이니 당시는 은나라 말기 주나라 초기(殷末周初)로서, 천하에 도를 펼치고자 하는 문왕의 절실한 우환(憂患)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역 계사전에 ‘역을 지은 자(作易者) 근심이 있었으리라(其有憂患乎)’는 구절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주역의 64괘 모두를 문왕의 처지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그중 명이(明夷)괘는 문왕이 유리옥 속에 갇힌 정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명이(明夷)괘를 글자대로 풀이하면, ‘밝을 명(明)’ ‘상할 이(夷)’자다. 괘상(卦象)으로 살펴보면, 곤괘(坤卦) 아래에 이괘(離卦)가 있으니 땅 속에 밝은 태양이 숨어 있는 모습이다. 또한 괘덕(卦德)으로 표현하자면 ‘밝은 덕이 상했다’는 뜻이니 문왕이 유리옥 속에 갇혀있음으로 비유할 수 있다. 또한 ‘밝은 덕을 감추었다’고도 표현할 수 있으니 문왕이 처신해야 할 바를 암시한 글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명이괘의 이 같은 뜻을 설명하기를 ‘안으로는 문명한 덕이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유순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난(大難)을 당했으니 문왕이 명이의 도를 본받았다’라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왕에게는 10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주(紂)가 문왕이 과연 성인(聖人)의 덕을 지니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첫째 아들을 죽여서 끓인 고깃국을 문왕에게 주었다 한다. 문왕이 어찌 이를 몰랐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천하의 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하여 알고도 모른 척 받아먹었다 하니, 이는 역시 한 순간의 분노를 삭이고 후일을 기약한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처신이었던 것이다.

  또한 문왕은 유리옥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호랑이 꼬리를 밟은 격(履虎尾)’이라 하였다. 이 글은 ‘밟을 리(履)’자의 리괘(履卦)에 나온다. 호랑이 꼬리를 밟았으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겠는가? 그러나 문왕은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을 것(不咥人)’임을 알았다. 천리에 순종해서 바르게 밟아 나간다면 아무리 포악한 주(紂)라 할지라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임을 확신한 것이다.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문왕은 7년 간의 감옥생활 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풀려나기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며, 이때 주역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밝은 덕을 감출 수 있는 지혜(用晦而明), 즉 명이(明夷)의 도를 간직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사기』나 기타 역사서에서는 창후의 신하인 산의생(散宜生) 굉요(閎夭) 등이 유신(有莘)씨의 미녀와 선마(善馬), 진귀한 보물 등을 주(紂)에게 진상하여 무사히 풀려나오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창후는 후에 주왕의 신임을 받아서 다른 제후들을 토벌할 수 있는 대권을 받아 서백(西伯)에 임명되었다. 서백(西伯)이 천명을 받은 때를 『사기』에서는 우예(虞芮) 두 나라의 분쟁을 조정 심판한 그 해로 잡고 있다. 당시 우(虞)나라와 예(芮)나라가 밭 경계를 놓고 다투었으나 서로 판결이 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서백이 덕이 있으므로 그에게 판결 받고자 주나라에 갔다. 국경선을 넘고 보니, 밭 가는 자 모두 경계를 사양하며(耕者皆遜畔), 어른에게 모두 양보하고 있음을 보았다(民俗皆讓長). 이에 두 사람은 부끄러워 서로 말하기를 “우리의 다투는 바는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다(吾所爭이 周人所恥라)” 하고 서백을 뵙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한남(漢南)의 서백에 귀의한 나라 40국이 모두 ‘명을 받은 인군(受命之君)’이라 칭송하였으니 이에 서백은 천하를 삼분(三分)함에 이(二)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해에 천명을 받들고 제후들의 지지 하에 ‘왕’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주왕의 계속적인 폭정으로 많은 제후들이 紂를 칠 것을 종용했으나 昌侯는 아직 천명이 나에게 내리지 않았다 하며 끝까지 신하의 예를 지켰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 후 문왕이라는 시호가 추존되었다. 이후 은나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법령과 제도를 만들게 된다. 고공단보를 추존해서 태왕(太王)으로 삼고 계력(季歷)을 왕계(王季)로 삼고 서백(西伯)을 문왕(文王)으로 삼았으며, 화덕(火德)으로 왕(王)하여 자월(子月)로 세수(歲首)를 삼았다. 고공단보로부터 시호를 추존한 이유는 주왕조의 왕업이 이로부터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다.『시경』대아.文王之什에 문왕의 덕을 칭송한 시가 있으니 이는 문왕이 천명을 받아 주나라를 일으켰음을 읊은 것이다.

 

文王在上(문왕재상)하사    문왕이 위에 계셔

於昭于天(오소우천)하시니  아, 하늘에서 밝게 계시니

周雖舊邦(주수구방)이나    주나라가 비록 오랜 나라지만

其命維新(기명유신)이로다  그 명이 새로워라

有周不顯(유주불현)가      주나라가 드러나지 않으랴

帝命不時(제명불시)아      상제의 명이 때에 맞지 않으랴

文王陟降(문왕척강)하시니  문왕의 오르고 내리심이

在帝左右(재제좌우)시니라  상제의 좌우에 계시니라
▶ 필자는 대전광역시 유성문화원과 학회에서 주역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14:00~16:00 : 주역상경.(학회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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